그 은혜를 잊지 마십시오(창세기 28:10-22)
지난 주에는 야곱이 팥죽 한 그릇으로 형 에서의 장자권을 얻는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후 아버지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지자 큰 아들 에서를 불러서 사냥하여 잡은 고기로 요리해 오라고 부탁합니다. 큰 아들이 요리한 고기를 먹고 큰 아들에게 장자의 축복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리브가가 들었습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아버지 이삭은 큰 아들 에서를 좋아했지만 어머니 리브가는 작은 아들 야곱을 좋아했습니다. 리브가는 얼른 야곱을 불러 큰 아들 에서 대신 장자의 축복을 받게 할 음모를 꾸밉니다. 리브가는 야곱에게 아버지가 눈이 어두우니 형 에서로 위장하여 장자의 축복을 받으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못한다고 했지만 야곱은 결국 어머니의 말대로 아버지를 속여서 장자의 축복을 받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에서는 이를 갈면서 동생을 죽이려고 합니다.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고 리브가는 야곱을 멀리 외삼촌 라반에게 보냅니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가기 위해 길을 떠나는 야곱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당시 야곱이 살던 곳은 브엘세바였고, 외삼촌 라반이 사는 곳은 하란이었습니다. 브엘세바는 현재 이스라엘에 위치하고 있고, 하란은 지금으로 말하면 시리아와 터키의 국경 정도에 해당됩니다. 브엘세바에서 하란까지는 약 900km나 떨어진 먼 거리입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가 약 400km입니다. 따라서 브엘세바에서 하란에 가려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왕복하고도 100km를 더 가야 합니다. 상당히 먼 거리죠. 게다가 당시는 걸어서 가야 하기 때문에 하루에 30km씩 걷는다고 해도 한 달 정도 걸리는 먼 거리입니다.
어느 날 야곱은 걷다가 해가 져서 길에서 유숙하게 되었습니다. 브엘세바에서 이 곳까지는 약 100km 정도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니 대략 집 떠난지 3일 쯤 되었을 것입니다. 길을 가다가 어두워지자 야곱은 돌을 하나 가져다가 그것을 베개로 삼아 잠을 청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돌로 베개를 삼는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이지만 옛날 어른들은 나무로 만든 딱딱한 베개를 베고 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그런 사실로 미루어 짐작해 볼 때, 고대인들은 충분히 돌베개를 베고도 잠을 잘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한편 길을 가다가 어두워졌다는 것은 앞으로 펼쳐질 야곱의 인생에 드리워질 어두운 그림자를 떠오르게 합니다.
그 밤에 야곱은 꿈을 꾸었는데 꿈에 사다리를 보았습니다. 사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습니다. 쉽게 말해서 땅에서 하늘까지 연결된 사다리였습니다. 그 사다리에서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내린다는 말은 천사들이 하나님이 계신 하늘과 사람이 사는 땅을 왕래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 꼭대기에 서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같이 13-15절까지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13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15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첫째, 하나님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이삭과도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이제 그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서 이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무슨 뜻입니까?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이삭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께서 야곱의 인생 가운데 그 언약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할아버지나 아버지와 맺은 언약을 반드시 지키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네가 누워있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 언약의 내용을 말씀하십니다. 지금 야곱은 혈혈단신으로 하란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아마 야곱은 자신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두려운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그 땅을 야곱에게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야곱의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 동서남북으로 퍼져나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장래에 대해 불안감을 가지고 있는 야곱에게 하나님의 약속은 크게 격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야곱과 야곱의 자손에게 이 땅을 준다는 약속이나 야곱의 자손이 동서남북으로 퍼져나간다는 약속은 야곱이 죽지 않고 결혼하여 자녀를 낳는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자신의 장래도 알 수 없어 불안한 야곱에게 자손들이 퍼져나간다고 하니 얼마나 큰 격려가 되겠습니까? 자신은 물론이고 자손들까지 지켜주신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셋째, 하나님은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래 이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했던 것입니다. 다같이 창세기 12:1-3을 같이 읽겠습니다.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가운데 마지막에 보면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약속과 동일한 약속을 야곱에게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을 야곱을 통해서 계속 이루어가시겠다는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은 야곱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어디로 가든지 야곱을 지키고 야곱을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함께 한다는 것은 임재의 약속입니다. 지키겠다는 것은 보호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의 보호로 이어집니다. 야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반드시 야곱을 지키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반드시 야곱을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야곱을 집에서 떠나게 했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반드시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결코 야곱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야곱이 꿈에 본 사다리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언뜻 이 사다리를 생각하면 마치 우리가 그 사다리를 타고 하나님이 계신 곳까지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사다리는 불완전한 이 땅에서 완전한 하늘까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은 이제 그 사다리를 타고 완전한 하나님이 계신 곳까지 올라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 길에는 많은 유혹이 있겠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으로 그 유혹을 물리치고 하나님이 계신 완전한 곳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신앙을 그런 식으로 생각합니다. 신앙을 내가 참고 견디면서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것처럼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자신이 이제 절반쯤 왔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야곱의 사다리는 그런 우리의 생각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은 사다리 꼭대기에서 우리를 보고 노력하여 올라오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자신이 야곱을 지키고 돌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은 곧 야곱에게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서 야곱과 함께 하여 야곱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특징입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은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늘로 이끄시는 방법입니다. 그런 면에서 야곱의 사다리는 복음의 성격을 우리에게 암시적으로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도 그렇게 찾아오십니다. 저 하늘에서 우리를 보고 노력하여 올라오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의지력이 약해서 어떻게 하겠느냐고 책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 인생 가운데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고난당할 때 먼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갈 길을 몰라 방황할 때 우리의 길이 되시고, 참이 무엇인지 몰라 헤맬 때 우리의 진리가 되시고, 사망의 길로 달려가는 우리에게 참 생명이 되십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기 위해 자신이 먼저 이 땅에 찾아오십니다. 그래서 복음입니다.
이제 야곱이 그 복음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16-19절까지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16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7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18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9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꿈에 하늘에 이르는 사다리를 보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야곱은 이제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야곱은 몇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첫째, 야곱은 여호와께서 여기 계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 곳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릅니다. 야곱은 지금 하란으로 가는 길에서 유숙하고 있습니다. 돌 베개를 베고 잠을 청하다가 꿈을 꾸었는데 꿈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경험을 통해 야곱은 하나님이 바로 그 자리에 계시다는 것을 깨닫고 그 곳을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라고 부릅니다. 둘째, 야곱은 자신이 베개로 삼았던 돌로 돌기둥을 세우고 기름을 붓습니다. 돌기둥을 세우고 기름을 붓는 것은 일종의 예배행위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잠들었던 곳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셨음을 깨닫고 그 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셋째, 야굡은 그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고 부릅니다. 본래 그 곳의 이름은 루스였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곳의 이름을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의 벧엘이라고 부릅니다. 비록 지금 야곱이 도망자의 신세이지만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집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하란으로 가는 길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야곱은 이제 하나님께 몇 가지 서원을 합니다. 20-22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20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21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2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야곱은 하나님께 서원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언급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조건처럼 제시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이 조건은 전부 이미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내용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조건처럼 언급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시면 자신도 서원한 것을 지키겠다는 뜻입니다.
야곱의 서원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야곱은 “만약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고 서원합니다. 이 서원은 평생 여호와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삼아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둘째, 야곱은 “만약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라고 서원합니다. 바로 이 장소에서 다시 하나님을 예배하겠다는 말입니다. 셋째, “만약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합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십일조의 서원을 드렸습니다. 수입이 십분의 일을 드리는 십일조는 내가 얻은 수입 전체가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소유권에 대한 인정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이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십분의 일만 하나님의 것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내게 주신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의미로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입니다. 야곱의 서원은 말하자면 사람 편에서의 의지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으니 그 은혜에 반드시 보답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하는 것이 바로 서원입니다.
야곱의 모습을 보고 신학자들은 상반된 평가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야곱의 서원을 지나치게 미화하여 그의 신앙을 고상한 것으로 평가합니다. 반면에 또 다른 사람들은 야곱의 서원을 지나치게 계산적인 것으로 보고 그의 신앙을 평가절하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야곱을 미화할 필요도 없고 폄하할 필요도 없습니다. 야곱은 아직 완성품이 아닙니다. 여전히 공사중인 인간에 불과합니다. 야곱은 여전히 인간적인 약점을 드러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하나님과 협상하려고 합니다. 서원하면서도 조건을 답니다. 그렇지만 야곱을 지나치게 나쁘게 볼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앞날이 불확실할 때 우리는 여전히 염려하고 근심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면 감격합니다. 그러나 그 감격이 그리 오래가지 못합니다. 한 순간에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여전히 우리는 계산적으로 행동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야곱은 우리 자신을 비추어주는 거울과 같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곱은 놀라운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런 약속을 받기 위해 야곱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는 그저 잠을 자다가 꿈에 그런 놀라운 약속을 받았을 뿐입니다. 경건한 태도로 예배드리던 중에 이런 은혜를 체험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불안에 떨며 잠을 자다가 이런 놀라운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 조건 없이 야곱에게 일방적인 은혜로 이런 약속을 주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야곱에게 그렇게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푸셨습니까? 그 이유는 은혜란 본래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나의 어떤 조건을 보고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본래 아무 자격 없는 자에게 일방적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야곱이 한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후에 야곱은 크게 결단하고 서원하였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수준에서 나름대로 헌신하며 서원하였습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야곱의 조건부 서원을 미숙한 신앙적 표현이라고 질타합니다. 그러나 야곱의 그런 헌신을 수준 낮은 조건부 서원이라고 무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야곱의 그런 조건부 서원을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미숙한 서원이 맞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미숙한 서원을 받아주십니다. 그 따위 조건부 서원을 하느냐고 질책하지 않으셨습니다. 야곱의 서원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입니다. 높은 수준을 정해 놓고 우리를 몰아세우고 질책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미숙한 모습일지라도 진심을 담아서 헌신하면 그냥 그 모습을 받으십니다.
나중에 야곱은 온전히 변화됩니다. 야곱을 이렇게 바꾼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와 용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태어나기 전부터 그를 사랑하기로 선택하셨습니다. 그가 인간적인 술수를 쓰고 거짓을 행할 때에도 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여러 훈련의 과정을 통해 그를 연단하시기는 했지만 단 한 번도 그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얍복강에서 그를 온전히 변화시킵니다. 사기꾼 야곱을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사람 이스라엘로 변화시킵니다. 야곱은 일평생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로인하여 그는 결국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하나님의 은혜는 야곱에게만 임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도 그 은혜가 한결같이 임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도 나름대로 헌신하고 결단했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사실 조건을 붙여서 헌신할 때가 많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좋은 것을 주시면 그런 때만 감사한 적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의 미숙한 헌신도 다 받아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처럼 여전히 거짓되고 여전히 미숙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그런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임했습니다. 바로 그 은혜가 결국 우리를 온전히 변화시킬 것입니다.
히브리서 11:21은 야곱의 말년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다같이 히브리서 11:21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이 말씀은 야곱이 인생의 말년에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축복하는 모습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죽기 전에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하고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경배합니다. 이 말씀에 나오는 야곱의 모습은 그의 온전한 변화를 함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왜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경배를 드렸을까요? 야곱은 요셉을 어린 시절에 잃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요셉을 다시 찾았습니다. 요셉을 찾기 위해 야곱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만약 요셉이 살아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아마 야곱은 지구 끝까지 가서라도 요셉을 찾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요셉이 죽었다고 생각하여 찾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말년에 요셉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그 날 요셉을 다시 찾게 하시고 요셉의 두 아들까지 보고 축복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전율할만큼 감격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여 지팡이에 의지하고 서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비로소 야곱이 깨달은 것입니다. 자신과 같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술수에 능한 사람을 끝내는 변화시켜 믿음의 계승자로 삼아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 야곱은 지금 그 은혜에 감격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은혜를 잊지 마십시오. 결국 하나님은 그 은혜로 우리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우리의 어떠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신실하심 때문에 하나님은 끝까지 우리를 버리지 않고 우리를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그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우리를 따르게 하신 그 은혜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힘을 내어 결단하고 헌신하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