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 | 안진섭목사 | 본문 | 고린도전서 8:1-7, 9:1-8 |
조회수 | 1102 | 설교일 | 2017-10-01 |
작성자 | 박경진 | 작성일 | 2017-10-01 12:56:06 |
헌금은 은혜다 |
헌금은 은혜다(고린도후서 8:1—7; 9:1-8)
주중에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오래 전 일이 떠올랐습니다. 새누리교회에서 목회하던 시절에 있었던 일입니다. 성도총회에서 교회 건축에 관해 논의하던 중에 한 성도가 갑자기 제게 이런 요청을 했습니다. “목사님, 앞으로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헌금설교는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그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저도 모르게 울었습니다. 그리고 즉석에서 이렇게 답했습니다. “여러분, 제가 지금 왜 우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이 불쌍해서 울었습니다. 여러분이 그 동안 얼마나 목사들에게 시달렸으면 그런 말씀을 하겠습니까? 성경에 근거도 없는 헌금설교로 헌금을 강요하는 일을 얼마나 많이 겪었으면 제게 그런 요청을 하시겠습니까? 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성경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설교를 한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역시 성경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설교를 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저는 지금까지 목회하면서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설교를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제가 부족해서 성경을 잘 못 해석한 경우는 혹시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성경을 왜곡하거나 목회적 성과를 달성하기 위해 성경을 이용하거나 한 적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 일의 증인이기도 합니다. 교회 리더들 가운데는 간혹 제게 헌금설교를 너무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헌금설교를 좀 해 달라고 요청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지금까지 의도적으로 헌금설교를 회피하지는 않았습니다. 책별 강해설교를 하다가 헌금에 대한 말씀이 나오면 헌금설교를 했습니다. 주제별로 설교하다가 헌금에 대한 주제가 나오면 설교했습니다. 또한 교회적으로 꼭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헌금설교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횟수가 많지 않기 때문에 제가 헌금설교를 너무 안 한다고 느끼신 것 같습니다.
오늘 저는 헌금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여러분이 예상하시는 것처럼 우리 교회가 지금 공간 마련을 위한 건축헌금을 앞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지금 건축헌금을 많이 모금하기 위해 이 설교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건축헌금을 많이 모금하려면 아마도 솔로몬의 성전 건축과 같은 본문을 택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성전을 오늘날의 예배당과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예배당은 성전이 아닙니다. 참 성전은 바로 성령을 모시고 사는 우리 성도들이며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입니다. 따라서 저는 솔로몬의 성전 건축과 같은 구약의 성전 건축에 관한 본문으로 건축헌금에 대해 설교할 계획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건축헌금에 대한 본문이 아닙니다. 다만 이 시점에 우리가 헌금에 대한 성경적 원리를 바르게 배울 필요가 있다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에 오늘 이 본문으로 헌금에 대해 설교하려고 합니다. 제가 늘 그래왔던 것처럼 오늘도 역시 온전히 성경에 근거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성경 말씀이 가는 곳까지 가고, 성경 말씀이 멈추는 곳에서 멈출 것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헌금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건축헌금이 아니라 일반적인 헌금의 원리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본문으로 삼아 여러분들에게 헌금에 담긴 성경적 원리가 무엇인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이 고린도후서의 말씀을 잘 들으시고 바른 성경적 원리에 따라 신실한 헌금생활을 하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본문인 고린도후서 8-9장은 성경 전체에서 헌금에 관하여 가장 탁월한 가르침을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먼저 이 말씀이 기록된 배경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여 많은 이방인들이 주께로 돌아오자 이방인에게도 할례를 요구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습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을 중심으로 제1차 예루살렘 공회를 열었습니다. 그 회의에서 사도들은 이방인에게 할례를 요구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다만 우상숭배와 음행 등 몇 가지 기본적인 것들은 잘 지키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그 때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바울에게 부탁한 것이 한 가지 더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헌금을 모금하는 일을 자신의 중요한 사역으로 여겼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헌금을 위해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말씀에서 헌금에 담긴 신학적 원리들을 잘 풀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상황은 좀 다르지만 오늘 말씀이 헌금에 담긴 신학적 원리를 잘 풀어서 전하고 있기 때문에 이 원리를 우리의 상황에 맞게 잘 적용한다면 신실한 헌금생활에 크게 유익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고린도전서 8-9장을 자세히 읽어보면 크게 세 가지 정도의 헌금 원리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헌금의 원리는 “은혜를 따라 헌금하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1을 같이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여기서 마게도냐 교회들은 빌립보교회와 데살로니가교회 등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지금 그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너희에게 알린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너희는 당연히 이 서신의 수신자인 고린도교회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은혜라는 단어는 마게도냐 교회들의 헌금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헌금을 은혜라고 불렀을까요? 그 이유는 2절에 나옵니다. 8:2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은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난한 중에도 그들은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였습니다. 여기서 연보는 헌금을 가리킵니다. 어떻게 극심한 가난 중에서 넘치는 연보를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비결은 은혜밖에 없습니다.
헌금은 참으로 은혜입니다. 은혜가 아니면 제대로 헌금할 수 없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이 헌금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가 많은 사람이 헌금하는 것입니다. 헌금은 주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나를 구원하신 그 은혜,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믿음으로 살게 하신 그 은혜에 감사한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 바로 헌금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들의 헌금을 은혜라고 부른 것입니다. 3절에는 당시 마게도냐 교회들이 어떻게 그 은혜를 따라 헌금했는지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우리 8:3을 같이 보겠습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은 힘대로 할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헌금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헌금을 은혜라고 부른 것입니다. 은혜가 아니면 그렇게 힘에 지나도록 헌금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헌금은 누가 시켜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심령에 차고 넘쳐서 감사한 마음이 있을 때 비로소 그 은혜를 따라 헌금할 수 있는 것입니다.
5절을 보면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헌금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 8:5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헌금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상황으로 보면 헌금도 결국 누군가 사람에게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헌금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그 돈을 가져가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 사람에게 주어서 그 사람이 사용합니다. 그런데 5절에서는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우리에게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헌금하는 원리입니다. 헌금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헌금 자체를 받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헌금이 아니라 헌금하는 사람을 받으십니다. 헌금에 담긴 그 사람의 마음, 더 나아가 그 사람 자신을 받으십니다. 그래서 5절에서는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렸다고 한 것입니다. 헌금할 때는 먼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 곧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 헌금에 내 마음을 담아, 아니 내 존재 자체를 담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헌금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웃을 위해 쓰이는 것입니다.
이제 8:6을 같이 보겠습니다. “6.그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 그가 이미 너희 가운데서 시작하였은즉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하게 하라 하였노라” 마게도냐 교회들의 예를 든 후에 바울은 이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하라고 권합니다. 여기서 ‘은혜’라는 단어는 역시 헌금을 가리킵니다. 시작한 헌금을 끝까지 잘 성취하라는 말입니다. 8:7을 보겠습니다.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바울의 선교팀을 사랑하는 일에 풍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하라고 권합니다. 이 은혜가 뭘 가리킵니까? 예, 헌금을 가리킵니다. 너희가 믿음과 말과 지식과 우리를 사랑하는 일에 풍성한 것처럼 하나님께 헌금하는 일에도 풍성하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헌금은 은혜입니다. 헌금은 은혜가 풍성한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우리 교회는 헌금자 명단이나 헌금 액수 등을 공개하지 않습니다. 재정을 투명하게 운용하기 위해 전체적인 헌금의 액수와 사용처는 공개하지만 개인의 헌금내역은 일절 공개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에서 헌금하는 분들은 온전히 하나님께만 헌금을 드리는 것입니다. 헌금을 많이 한다고 해서 누가 알아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헌금을 안 한다고 해서 책망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 성도들 가운데 많은 분들이 신실하게 헌금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바로 은혜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하여 그 감사한 마음으로 헌금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직 그 은혜를 따라 헌금하시기 바랍니다. 헌금은 받은 은혜에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적 헌신의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억하시고, 그 은혜를 따라 헌금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그런 헌금을 기쁘게 받으실 줄로 분명히 믿습니다.
이제 9:3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런데 이 형제들을 보낸 것은 이 일에 너희를 위한 우리의 자랑이 헛되지 않고 내가 말한 것 같이 준비하게 하려 함이라” 이게 무슨 말일까요? 바울은 먼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헌금을 준비하는 것을 보고 마게도냐 성도들에게 자랑했습니다. 그래서 마게도냐 성도들이 도전을 받고 열심히 헌금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처음에 그렇게 도전을 준 고린도교회는 내부적 갈등으로 그 열정이 식어버렸습니다. 그러니 이제 바울의 자랑이 헛된 것이 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형제들을 보내 다시 헌금을 준비하게 한 것입니다. 9:4을 보겠습니다. “혹 마게도냐인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가 준비하지 아니한 것을 보면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노라” 그런데 만약 마게도냐 성도들과 함께 가서 보니 전혀 헌금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바울 일행은 크게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먼저 형제들을 보내 헌금을 준비하게 합니다. 9:5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게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바울은 형제들을 미리 보내 준비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였습니까? 그 이유는 그렇게 미리 준비해야 억지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참 연보다운 헌금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서 바울은 헌금할 때는 미리 준비해서 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렇다면 왜 헌금할 때 미리 준비하는 것이 필요할까요?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억지로 하거나 혹은 감정에 휘말려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교회 건축하면 건축을 위한 전문 부흥사를 모셔왔습니다. 그런 부흥사들은 성도들의 감정을 고조시킨 후 경쟁적으로 헌금을 작정하게 합니다. 처음에는 망설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성도들이 작정하는 것을 보면 분위기에 휩쓸려 즉석에서 작정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리고 집에 가면 후회를 합니다. 헌금을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그런 식으로 사람을 의식하여 억지로 하거나 혹은 감정에 휘말려서 하게 됩니다. 그래서 미리 준비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헌금할 때는 미리 기도로 준비하십시오. 가족들과도 함께 기도하며 상의하십시오. 그렇게 마음으로 준비되고 기도로 준비하여 드리는 헌금이 진정성이 있는 헌금이 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헌금의 원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헌금하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9:7을 같이 보겠습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사도 바울은 그 마음에 정한대로 헌금하라고 했습니다.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 바로 앞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9:6을 같이 보겠습니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는 사상은 잠언이나 시편과 같은 지혜 전승에서 나온 것입니다. 시편 126:5은 이렇게 말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이런 말씀에 근거하여 바울은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말씀을 기계적으로 적용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런 말씀들을 마음의 표현에 초점을 맞추어 적용합니다. 그래서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무조건 많이 내는 자만 사랑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그 헌금에 담긴 그 사람의 마음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는 자가 아니라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사실 하나님에게는 재물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이 다 그 분의 것인데 더 이상 무슨 재물이 필요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헌금을 통해 보기를 원하시는 것은 바로 그 헌금에 담긴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을 건축할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기쁜 마음으로 내는 자가 바치는 것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런 헌금만이 드리는 이의 마음이 담긴 헌금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헌금하는 것이 기쁘고 감사합니까? 저는 헌금하는 것이 기쁘고 감사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가 헌금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주님께로부터 영육간에 받은 은혜가 많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기쁘고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본문 9:8을 같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은혜를 넘치게 부어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나로 하여금 착한 일을 넘치게 하기 위해 내게 풍성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 은혜를 풍성하게 받아 그 은혜로 하나님께 드려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니 헌금하는 일은 즐겁고 감사한 일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은 고린도후서 8-9장에서 헌금에 대해 집중적으로 강조합니다. 8-9장에서 바울이 말하는 바를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헌금은 은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설교의 제목을 헌금은 은혜다, 라고 정한 것입니다. 바울은 8장을 시작할 때 “은혜”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9장을 끝낼 때도 14절에서는 은혜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9:15에서는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라고 말할 때 바울은 자신의 몸까지 우리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주시는 그 엄청난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결국 우리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즐거이 헌금하게 되는 것입니다. 헌금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돈이 많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체험한 사람이 많은 것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헌금은 정말 은혜입니다. 또한 헌금을 드리면 그 헌금으로 도움을 받는 사람들도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 헌금으로 도움을 받은 사람은 그 헌금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헌금한 사람의 은혜임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더 나아가 헌금을 드리면 결국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왜냐하면 헌금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헌금은 은혜의 아름다운 순환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헌금이 일으키는 아름다운 영적 선순환을 생각해 보십시오.
1) 하나님께로부터 은혜가 내게 내려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것이 바로 헌금입니다. 그래서 헌금을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부요하신 자로서 스스로 가난하게 되신 것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부요하게 하신 그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헌금을 드리십시오. 돈이 없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것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없는 것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주님의 자녀들이 더욱 풍성한 것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헌금은 우리에게 풍성한 것을 베푸시기 위한 우리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주님께 드리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더욱 풍성한 은혜를 여러분의 삶에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과 여러분의 주위에 풍성한 은혜의 선순환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 메마른 땅에 우리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넘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헌금의 은혜와 관련된 여러분의 체험을 생각해 보십시오. 헌금과 관련된 여러분의 간증이 있습니까? 헌금을 통해 우리 하나님은 크신 은혜를 깊이 체험한 간증이 있습니까? 이제 다시 한 번 여러분에게 이 귀한 헌금이 귀한 은혜의 간증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헌금은 은혜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차고 넘치기를 은혜의 원천이신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