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안진섭목사
조회수 327
작성일 2009-03-29 00:00:00
가상칠언 4 : 버림받음
2009년 3월 29일 주일예배 설교 녹음
제목 : 가상칠언 4 - 버림받음
설교 : 안진섭 목사님
말씀 : 마태복음 27:46.



요즘 새벽마다 우리 교회 주변이 시끄럽습니다. 이른 새벽에 차량 행렬이 이어져 주변에 차량이 가득하고, 매일 새벽마다 예배당을 가득 메운 성도들의 찬송과 기도 소리가 울려퍼지는 장관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아직도 이 새벽을 깨우는 대열에 동참하지 못하고 계시는 분들은 사순절이 끝나기 전에 꼭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사순절 새벽기도회가 단 두 주 남았습니다. 그 동안 열심히 참석하다가 지친 분들도 계신 것 같습니다. 그 동안 열심히 참석한 분이든, 혹은 참석하다가 중단하신 분들이든, 남은 기간 동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참석하시면 좋겠습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여 두 주만 참석한다고 생각하시면 훨씬 더 가벼운 마음으로 참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계속 반복되는 말씀이지만 생활패턴을 그대로 둔 채, 새벽예배를 드리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생활패턴을 근본적으로 조정하여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방식으로 바꾸셔야 새벽예배를 지속할 수 있습니다. 또한 새벽예배를 위하여 다른 것들을 과감하게 포기하셔야 합니다.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가상칠언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가상칠언이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하신 일곱 가지 말씀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하신 말씀들도 다 의미가 있지만, 십자가에 달려 극심한 고난 중에 하신 말씀들은 그 분의 고난의 정수를 보여주는 말씀들이기 때문에 더욱 의미있고 소중합니다.

첫째 주에는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누가복음 23:34).”라는 말씀으로 ‘용서’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둘째 주에는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누가복음 23:43)”라는 말씀으로 ‘은혜’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셋째 주, 곧 지난주에는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한복음 19:26-27).”라는 말씀으로 ‘가족’의 의미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가상칠언 설교의 네 번째 시간으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태복음 27:46)”라는 말씀으로 예수님의 ‘버림받음’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오늘을 제외하면 부활절 전에 주일은 단 한 주만 남기 때문에 앞으로 수요일에도 가상칠언 설교를 할 계획입니다. 이번 주 수요일에는 “내가 목마르다(요한복음 19:28)”라는 말씀으로 ‘목마름’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음 주일에는 “다 이루었다(요한복음 19:30)”라는 말씀으로 ‘사명의 완성’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 수요일에는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누가복음 23:46)”라는 말씀으로 ‘아버지를 의뢰하는 삶’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 주 수요일과 다음 주 수요일에는 수요 1,2부 예배를 통합하여 저녁 7시 반에 한 번만 드립니다. 꼭 기억하셨다가 수요일 저녁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서 고난 주간의 금요일인 4월 10일, 곧 성 금요일에는 성 금요일 특별예배가 있습니다. 그 날은 예수님께서 고난주간에 걸으셨던 발자취를 따라서 겟세마네 기도, 주의 만찬, 세족식 등을 거행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올해 사순절에는 어느 해 보다 더 의미를 깊이 새길 수 있는 사순절예배와 행사가 많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 은혜의 시간을 놓치지 마시고 사순절 기간 동안 경건하게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순절을 경건하게 보낸 사람이 부활절을 더욱 큰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습니다.

사순절이 끝나면 바로 4월 12일 부활주일이 됩니다. 그 동안 매년 부활주일이 되면 새누리교회, 늘사랑교회와 연합으로 새벽예배를 드렸는데, 올해는 우리 교회에서 새벽 6시에 독자적으로 드립니다. 주일낮에는 침신대 강당에서 새누리교회와 함께 연합으로 드립니다. 주일 오후 3시 30분에는 월드컵 경기장에서 대전시기독교연합회 주관으로 부활절 연합예배를 함께 드립니다.

이번에 대전시부활절연합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세 교회가 새벽에 함께 연합예배 드리는 것을 일시적으로 중단했습니다. 많은 예배와 행사로 인하여 몸은 좀 피곤할 수 있지만, 이런 예배를 통하여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더욱 깊이 경험하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가상칠언 가운데 네 번째 말씀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먼저 자신을 해하는 자들에게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 후 십자가 옆에 달린 행악자에게 은혜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 후에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모친 마리아를 부탁하셨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입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 자신을 해하는 자들에게 말씀하시고, 십자가 옆의 행악자에게 말씀하시고,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신 후, 이제 예수님은 하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말씀하십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엘리는 히브리어로 나의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라마 사박다니는 아람어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말입니다. 아람어와 히브리어는 상당히 유사합니다.

아마 예수님은 본래 당시 널리 통용되던 아람어로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구분이 되어 있지 않지만, 원문을 보면 마가복음에는 엘리가 아니라 엘로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는 히브리어이고 엘로이는 아람어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엘로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마태가 히브리식 발음으로 엘리라고 표기한 것 같습니다.

복음서를 종합해 보면 예수님은 오전 9시경에 십자가에 못 박혀 온갖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지나가는 군중들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당장 내려오라고 조롱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도 예수님을 향하여 남은 구원하였지만 자신은 구원할 수 없다고 조롱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혔던 한 행악자도 그와 같이 예수님을 조롱하였습니다.

12시쯤부터는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습니다. 어두움이 온 땅을 덮은 상태에서 오후 3시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구약에서 어두움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운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다가 오후 3시경이 되었을 때,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바크타니”하고 외쳤습니다.
1.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의 의미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이 부르짖음의 의미를 좀 더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때 당하셨던 고통의 실체는 무엇이었습니까? 과연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이토록 고통스러워 하셨습니까? 단지 육체의 고통 때문이었습니까? 물론 육체의 고통도 말할 수 없이 힘든 것입니다.

사형의 방법 가운데 십자가 고통보다 더 심한 고통은 없다고 합니다. 현대의 사형 방법처럼 총으로 죽이거나, 목 매달아 죽이는 것은 잠깐이면 끝납니다. 심지어 참수형도 그리 오랜 시간 동안 고통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고통은 손과 발에 큰 못이 박힌 채 강렬한 태양 아래서 온 몸의 피와 물이 다 빠져나갈 때까지 긴 시간 동안 극심한 고통에 시달려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양 손과 발에 못이 박힌 채, 무려 여섯 시간 동안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때 당하신 고통은 단순히 육체의 고통만이 아닙니다. 비록 십자가의 고통이 극심한 것이라고 하지만, 예수님의 이 부르짖음은 단지 육체의 고통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경험하신 극심한 고통의 실체는 과연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고통 중에 외치신 말씀을 주목하여 보면, 예수님이 느꼈던 고통의 실체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하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느냐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고통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에 대한 고통이었습니다.

2.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면에서 하나님께 버림받았습니까?

먼저 이 말씀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때로 잘못된 해석이 무엇인지 알면, 바른 해석의 길을 찾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고대 영지주의자들은 바로 이 순간, 예수님의 신성이 예수님의 몸을 떠났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침례받으실 때, 신성이 임했다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렸을 때, 그 신성이 떠났다고 주장했습니다. 왜 영지주의자들이 이런 잘못된 해석을 했을까요?

영지주의자들은 영과 육을 철저히 분리하여 이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의 시각으로 볼 때, 신성을 가진 예수님이 이런 고통을 당하신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왜 나를 버리셨느냐”고 울부짖는 예수님의 모습은 단지 연약한 인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순간 예수님의 신성이 예수님을 떠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들의 문제점은 예수님의 버림받음을 존재론적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이 순간에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지위 자체를 빼앗겼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의 버림받으심은 결코 존재론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의 지위, 곧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하는 그런 차원에서 버림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의 버림받으심은 존재론적인 면이 아니라 관계적인 면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늘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우리 예수님은 그런 친밀한 관계의 단절을 경험했습니다.

우리는 아직 하나님과 온전한 연합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온전히 친밀하게 연합했던 예수님의 입장에서 그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다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3.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당하는 고통을 경험해야 했습니까?

신약성경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당하는 경험을 해야 했던 이유를 우리의 죄악에서 찾습니다.

로마서 3:23-25을 같이 읽겠습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마귀의 유혹을 받고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인간은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와 화목하기 위한 제물로 삼으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21을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님을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 분의 속죄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로마서 6:23에 기록된 것처럼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인간은 죄를 짓고 하나님과 완전히 분리되는 죽음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인간의 죄를 대신 지셨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단절되는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한 분리를 경험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우리를 다시 회복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골로새서 1:20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창조물과 화목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이런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마태복음 20:28을 같이 읽겠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이 사실을 알고 계셨던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받는 이 잔을 마시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잔을 받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기에 순종하기로 결단하셨습니다.

그렇게 기도로 준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한 분리를 경험하셨을 때, 그 분은 고뇌에 찬 외침으로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러므로 예수님의 외침은 단순히 버림받음에 대한 절망적인 외침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런 절망적인 자리에 서신 것은 바로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비록 하나님과 단절되는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울부짖을 수밖에 없지만 그 분의 그 외침은 우리를 살리기 위한 외침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이사야 53:4-5)

김영봉 목사는 그의 책, ‘가상칠언묵상’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의 버림받으심으로 저희는 구함을 받았습니다. 주님이 고난을 감당하심으로 저희가 고난을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절규를 통해 저희에게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주님의 절망을 통해 저희는 희망을 찾았습니다. 주님이 고독을 겪으심으로 저희 고독이 치유되었습니다. 주님이 암흑을 통과하심으로 저희에게는 빛이 찾아왔습니다.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바치신 생명이 저희에게 영원하고 참된 생명이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자신이 대신 그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셨기 때문에 그 분은 철저히 버림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버림받아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완전히 버림받아야 완전한 회복과 부활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4. 고난과 승리 - 나의 하나님

그런 면에서 이제 저는 조심스럽게 이 외침에 담긴 승리를 전망해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 외침은 단순히 버림받음에 대한 고통의 부르짖음만은 아닙니다.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 근거는 바로 시편 22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는 구약성경 시편 22:1을 인용한 것입니다.

시편 22:1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이 구절을 중심으로 시편 22편을 묵상해 보면 예수님의 부르짖음의 의미를 좀 더 깊이 알 수 있습니다.

시편 22편은 버림받은 고통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승리의 외침으로 끝납니다. 시편 22편의 끝부분인 27-2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27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28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그런 면에서 시편 22편은 버림받은 자의 고통을 노래하는 애도의 시이면서 동시에 신뢰의 시입니다. 시인은 극심한 고난 가운데 애통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분명히 버림받음에 대한 깊은 절망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탄식은 탄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마치 시편 22편에서 다윗이 절망적인 외침으로 시작했지만 마지막에는 승리의 소망을 노래한 것처럼, 우리 주님도 버림받음에 대한 고통으로 탄식하였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살리시는 구원의 소망을 보게 됩니다. 우리 주님은 고통 속에서 탄식하는 중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 증거는 바로 ‘나의 하나님’이라는 말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두 번이나 하나님을 향하여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정말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느낀다면, 이제 더 이상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해야 옳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주님은 여전히 그 분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시인이 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처럼, 우리 주님도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한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신앙이란 하나님을 향한 신뢰입니다. 사람간의 관계에서도 진정한 신뢰는 어려울 때 돋보입니다. 남편이 남들에게 불신당할 때, 내 남편은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아내는 신뢰해야 합니다. 내 아내가 남들에게 불신당할 때, 내 아내는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남편은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신뢰가 진정한 신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 우리 신앙의 진정성이 드러납니까? 그것은 바로 고난 중에 있을 때입니다. 왜 우리가 주기철 목사님이나 손양원 목사님을 존경합니까? 그 분들이 말할 수 없는 고난 중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세를 통해서 이루신 출애굽의 기적만 바라봅니다. 하나님이 열 가지 재앙으로 치신 그 강력한 표적들만 바라봅니다. 홍해가 갈라진 놀라운 기적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한 가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기적을 경험하기 이전에 무려 430년간 고난을 당했습니다. 사람들은 홍해의 기적만 생각하지만 홍해의 기적은 430년간의 침묵기를 통해서 잉태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시기 동안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런 순간에도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출애굽기 2:23-25을 같이 읽겠습니다.
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24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25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된 노동으로 탄식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기억은 반드시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돌보셨습니다. 여기서 돌보셨다는 말의 본래 의미는 방문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탄식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친히 자기 백성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출애굽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인생의 깊은 고난 가운데 들어가면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은 절망감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영성가들은 그런 상황을 ‘하나님의 부재’라고 불렀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부재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늘 어디에나 계십니다. 다만 내가 깊은 고난 가운데 있기 때문에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순간에도 사실 하나님은 늘 내 곁에 계십니다. 시편 139편에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시편 139:7-10
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주님은 언제나 거기에 계십니다. 내가 극심한 고통 속에서 신음할 때도 주님은 언제나 내 곁에 계십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을 때에도 주님은 거기에 계십니다. 내가 새벽날개를 치며 바다 끝까지 도망가도 거기에서 주님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기에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잊으신 것이 틀림없다고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49:14-15
14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은 고난입니다. 고통은 고통입니다. 우리 인생에 고난이 닥쳤을 때, 결코 그 고난을 부정하지 마십시오. 믿는 사람에게는 고난 따위는 없다고 허세를 부리지 마십시오. 믿는 사람에게도 분명히 고난은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 예수님도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도 육신을 입으신 사람이었습니다. 그 분도 극심한 고통에 실신하실 지경이었습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을 구원하려면 자신이 완전히 버림받아야 했습니다. 그 사실을 알기에 십자가를 졌지만, 하나님과 단절되어 어둠의 길을 가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십자가 위에서 절망감과 소외감 가운데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하고 외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을 살다 보면 절망적인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나를 버린 것 같은 허탈한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던 가족조차 나를 이해하지 못하여 세상에 나 홀로 남은 것 같은 깊은 소외감이 들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끝났다는 절망감이 나를 사로잡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마십시오. 성경은 결코 절망적인 환경이 없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소외감에 시달릴 때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불행한 사람인 것 같은 절망감이 밀려 올 때가 있습니다. 다만 그 때 우리 예수님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말할 수 없는 절망감과 소외감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하여 “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비록 하나님마저도 나를 버린 것 같은 깊은 절망감 속에서 신음할지라도, 그 분은 여전히 나의 하나님이라는 그 한 가지 사실만큼은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나를 살리기 위해서 친히 죽임을 당하신 주님, 그 주님을 통하여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때, 어둠 속에서도 환한 빛이 밝아올 것입니다. 절망의 어둠 속에서도 소망의 빛이 밝아올 것입니다. 십자가의 어둠 속에서도 부활의 빛이 비쳐 올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믿음으로 견딜 때, 그런 자가 부활의 영광을 경험할 것입니다.

기도 - 양강도 새누리교회, 그들은 결코 버림받은 자들이 아니다. 버림받은 것 같은 절망감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고백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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