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안진섭목사 | ||
조회수 | 347 | ||
작성일 | 2010-10-31 00:00:00 |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 |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요한복음 1:29-34)
요즘 제가 요한복음을 1장부터 계속 연속설교의 방식으로 설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18은 요한복음 전체의 서론입니다. 또한 그 서론의 핵심구절은 14절입니다. 그래서 제가 14절은 반드시 암송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워낙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같이 암송하겠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의 서론은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함께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이신 그 분이 인간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완전한 인간입니다.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제가 요한복음 설교의 첫 주에 요한복음의 기록목적을 말씀드렸습니다. 요한복음의 기록목적을 담고 있는 요한복음 20:31을 같이 읽겠습니다. 요한복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는 것이고, 둘째는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목적을 위하여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예수님이 누구신지 증거합니다. 서론에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을 증거한 사도 요한은 이제 침례요한을 증거자로 내세웁니다. 서론이 끝나자마자 침례요한은 연속해서 3일 동안 계속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침례요한의 첫 번째 증언은 주로 자신은 메시야가 아니라는 것에 집중되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침례요한을 메시야로 오해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침례요한은 주로 자신은 메시야가 아니라는 사실에 집중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다만 메시야가 오실 길을 준비하는 자라고 선포합니다. 참된 메시야는 뒤에 올 것인데 자신은 그의 종이 될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 오늘 본문은 침례요한의 두 번째 증언입니다. 침례요한의 첫 번째 증언은 주로 아니라는 것에 집중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메시야로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선지자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침례요한은 본격적으로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증거합니다. 2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침례요한은 예수님을 보면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하고 외칩니다. 여기서 “보라”라는 말은 무엇인가에 집중하도록 하기 위해 사용되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이 “보라”라는 표현이 몇 차례 나옵니다. 요한복음 1: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만나실 때, 그의 신실함을 보시고 감탄하듯 말씀하십니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의 신실함을 강조하기 위해 “보라”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9: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 사도 요한에게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하실 때 “보라 네 어머니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이제부터 네 어머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보라”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침례요한은 아주 중요한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보라” 옆 사람에게 말해 보세요. “보라” “졸지 말고 보라” 이제 침례요한은 아주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보라”하고 누구를 소개합니까?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우리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1. 여기서 세상의 죄를 지고 간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 하나님은 온전히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세상은 깨끗하게 정화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본래 세상을 그렇게 완전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세상에는 죄가 들어왔습니다. 죄가 들어온 결과로 세상은 더럽혀지고 파괴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세상을 다시 깨끗하게 만들기를 원하셨습니다. 세상을 깨끗하게 하는 방법은 이 세상의 죄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상의 죄를 지고 간다고 할 때 지고 간다는 단어는 정확히 말하면 죄를 제거한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죄를 제거하는 어린 양이라는 말입니다. 이 구절의 의미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씀은 요한일서 3:5입니다.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우리 죄를 없애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죄를 없애려면 마귀의 일을 멸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는 마귀에게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귀의 일을 멸하시는 분입니다. 요한일서 3:8을 같이 읽겠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우리 예수님은 마귀의 일을 멸하심으로 세상의 죄를 제거하십니다. 요한계시록 17:14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오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만왕의 왕이며 만주의 주이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악한 세력을 이기실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 부분에서 의문을 품을지 모릅니다. “도대체 그가 누구이기에 세상의 죄를 제거한다는 말인가?” 그런 의문을 품을 수 있습니다. 2. 그렇다면 그는 과연 누구입니까? 도대체 그가 누구이기에 세상의 죄를 제거합니까? 그는 어떻게 세상의 죄를 제거합니까? 1) 그는 흠 없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기 때문에 세상의 죄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흠 없는 어린 양을 제물로 바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레위기 9:2을 같이 읽겠습니다. “아론에게 이르되 속죄제를 위하여 흠 없는 송아지를 가져오고 번제를 위하여 흠 없는 숫양을 여호와 앞에 가져다 드리고” 이 말씀에 보면 번제를 드리기 위하여 흠 없는 숫양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오직 흠이 없는 온전한 제물만이 인간의 죄를 용서하는 온전한 제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한 것은 예수님은 흠이 없는 온전한 제물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을 가장 잘 설명한 말씀은 역시 이사야 53장입니다. 이사야 53:4-7을 같이 읽겠습니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 찔리고 상한 것은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그가 징계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았기 때문에 우리는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모든 죄악을 다 짊어지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가 바로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그는 아무 흠이 없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기 때문에 그 분만이 우리의 죄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목격자인 베드로는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제거했는지를 증언합니다. 베드로전서 1:18-19을 같이 읽겠습니다.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베드로는 예수님을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 양이라고 표현합니다. 어떻게 우리 예수님은 흠도 없고 점도 없을 수 있습니까?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은 다 아담의 후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근원적인 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릅니다. 그 분은 우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는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이 땅에 탄생하였습니다.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아무 흠도 없고 점도 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용서받은 것은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아무 흠도 없고 아무 점도 없는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침례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소개합니다. 이 세상의 어느 인간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침례요한을 메시야라고 오해했지만 침례요한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어림도 없는 소리입니다. 이 세상의 어느 인간도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될 수 없습니다. 그는 그런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 수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훌륭한 인간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될 수 없습니다. 석가와 공자와 마호메트가 훌륭한 인물인 것은 사실입니다. 역사 이래로 인간 중에서는 참으로 대단한 인물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결코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될 수는 없습니다. 대한민국에 있는 수많은 이단종파의 교주들은 자신들이 어린 양 예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턱도 없는 소리입니다. 석가와 공자와 마호메트도 어린 영이 될 수 없는데 그렇게 악한 죄를 짓는 이단의 교주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 기독교인들을 향하여 독선적이고 배타적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사람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들은 모든 종교에는 다 구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진리에 이르는 길만 다를 뿐 모든 종교는 다 진리를 추구하므로 구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불교의 승려들은 기독교 목사들에게 불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인정하라고 요구합니다. 어떤 목사가 불교도들의 모임에 가서 불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하면 기뻐하면서 그 목사를 칭찬합니다. 과연 기독교나 불교나 다 진리라는 말이 맞는 말일까요? 기독교에도 구원이 있고 불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말이 맞는 말일까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불교의 중심사상 중에 윤회사상이 있습니다. 해탈하지 않는 한 모든 인간은 윤회를 거듭합니다. 그것이 불교의 중심사상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말합니다. 불교는 윤회를 주장하고 기독교는 한 번 태어나면 죽는 것으로 이 땅의 삶은 끝난다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불교나 기독교 중에 한 쪽이 진리라면, 다른 쪽은 진리가 아닙니다. 윤회가 진리라면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말은 진리가 아닙니다. 반대로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말이 진리라면 윤회사상은 진리가 아닙니다. 이렇게 완전히 다른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둘 다 진리가 될 수 있습니까? 저는 차라리 승려들이 기독교에는 구원이 없다고 하고 불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말하면 그 말 자체는 이해하겠습니다. 그러나 양쪽에 다 구원이 있다거나, 양쪽이 다 진리라는 주장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 말은 단순한 립 서비스는 될 수 있어도 진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독선적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아무리 독선적이라고 해도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사실은 양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타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오직 그 분만이 우리의 죄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 땅에서 여러 다른 종교인들과도 평화를 도모하면서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기독교가 진리라고 해서 절에 가서 불상을 도끼로 찍는 행위는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에게 햇빛과 비를 고루 내려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종교에 관계없이 다양한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그들과 평화롭게 살아야 합니다.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협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타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교리까지도 타협할 수는 없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런 식으로 타협하는 것은 혼합주의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적당히 타협하여 살아갈 것이 아니라 참된 진리를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진리가 아닌 것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만이 세상의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될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세상의 죄를 제거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도대체 그가 누구이기에 세상의 죄를 제거합니까? 2)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서론은 그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그가 곧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사람인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입니다. 사람이 낳으면 사람이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이 낳으시면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침례요한은 자신이 예수님을 알게 된 사실을 증언합니다. 3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여기서 내 뒤에 온다는 말은 침례요한이 예수님보다 먼저 태어난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그가 나보다 앞섰다는 말은 예수님이 창세전부터 계시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비록 육체의 나이는 어릴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처음부터 계셨던 분이기 때문에 나 보다 앞섰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침례요한은 어떻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까? 사실 침례요한도 처음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3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침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침례요한도 처음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진정한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정체를 정확하게 알게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32-3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32: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침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식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침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하나님은 침례요한에게 누가 진정한 메시야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침례요한이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는 자이기 때문에 그에게 특별히 알려주신 것 같습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무르면 그 사람이 곧 메시야입니다. 그래서 사실 침례요한도 예수님을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와서 머무는 것을 보고 예수님의 정체를 정확히 알게 되었습니다. 3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그런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라 침례요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그 분은 세상의 죄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어느 인간도 세상의 죄를 제거할 수 없습니다. 동일한 죄인이 어떻게 죄를 제거합니까? 감옥에 있는 죄인들끼리 서로 죄를 용서하면 죄가 없어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죄인인 인간은 결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만이 죄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오직 육신이 되신 말씀, 그 분만이 세상의 죄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부른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큰 충격이 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어린 양은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물로 쓰일 어린 양이 학살당하듯이 하나님의 어린 양은 그렇게 죽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어린 양의 죽음은 세상의 죄를 제거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여기서 세상의 죄를 제거한다는 말은 자동적으로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죄가 제거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죄 용서받고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세상의 죄를 제거한다는 말은 아무런 차별 없이 세상의 죄를 제거한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 선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방인들은 모두 지옥 불의 불쏘시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런 차별 없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살리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그렇게 학살당하셨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없이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요한복음 3:16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차별없이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종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국적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가난하다고 차별하지도 않습니다. 배우지 못했다고 해서 차별하지도 않습니다.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마다 아무 차별없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를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죄를 용서받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지 않습니다. 이제 그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던 죄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표현한 것처럼 “순결한 눈을 가지신 하나님은 그 분 앞에 죄인이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십니다.” 존 파이퍼는 예수 믿기 전의 자신의 처지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예전에 나와 지옥이 지금 앉아 있는 의자만큼이나 가까웠다는 진리를 반드시 느껴야 합니다. 지옥의 어둠이 증기처럼 내 영혼에 밀려들어와 나를 유혹하여 넘어뜨리고 있었습니다. 지옥의 열기가 이미 내 양심의 피부를 태워버렸습니다. 지옥의 시각이 나의 시각이었습니다. 나는 지옥의 자식이자(마 23:15) 마귀의 자식이요(요 8:44) 진노의 자녀였습니다(엡 2:3). 또한 독사의 자식이었으며(마 3:7), 내게는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었습니다(엡 2:12).” 그런 우리가 죄를 용서받는 길은 단 한 가지, 오직 그를 믿는 것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를 믿는 것 밖에 없습니다. 요한복음 8: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 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면 자신의 죄 가운데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를 믿는 자는 그 아들 예수의 피가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릴 것입니다. 그를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특권을 누릴 것입니다. 그를 믿는 자는 생명을 얻고 더욱 풍성히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이 놀라운 약속을 풍성히 누리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