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안진섭목사
조회수 285
작성일 2011-07-10 00:00:00
후회 없는 인생을 살려면
2011년 7월 10일 주일예배 2부 설교 녹음

후회하지 않는 인생을 살려면?(요한복음 5:30)

나이를 먹다 보면 지나간 날의 삶에 대해 후회할 때가 있습니다. 과거를 생각하며 후회하다 보면 과거로 돌아가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정말 열심히 멋지게 살텐데,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유학할 때 일입니다. 어느 날 40대 중반의 나이에 유학 오신 분이 계셨습니다. 연구소에서 근무하시다가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뒤늦게 유학을 오셨습니다. 아무래도 20년 가까이 직장생활을 하시다가 오셨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에 비해서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어떤 젊은 전도사님이 부러운 마음에 한 마디 했습니다. “집사님은 좋으시겠어요. 돈 걱정 없이 공부만 하시니 얼마나 좋으세요?” 그 때 부인 집사님께서 웃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전도사님, 우리 가진 것 다 줄테니 그 젊음과 바꿔!”

실제로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만약 젊은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여러분은 언제로 돌아가고 싶습니까? 실제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상상은 자유니까 한 번 상상해 보겠습니다. 저도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과거로 돌아간다면 언제가 좋을까요? 어린아이로 돌아가는 것은 좀 그렇고, 중고등학교 학생 시절로 돌아가는 것은 어떨까요? 처음에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요즘 학생들을 보니까 돌아간다는 것이 끔찍합니다. 학교에서 밤 11시까지 공부할 것을 생각하니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싹 달아납니다. 또 요즘 같이 치열한 대학입시의 관문을 뚫는다는 것이 도저히 자신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대학생 시절로 돌아가면 어떨까요? 남자들은 대학생 시절로 돌아가는 것도 별로 달갑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군대를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군대를 다시 간다고 생각하면 젊음도 별로 달갑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대한 후 대학원 다닐 때로 돌아가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대학원 다닐 때 연애하고 결혼했기 때문에 그 때로 돌아가는 것은 괜찮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때로 돌아가면 다시 유학을 가야 합니다. 군대는 다시 가라면 가겠는데 유학은 다시는 못 가겠습니다. 유학시절은 좋았던 기억도 있지만 힘들었던 기억이 많아서 사실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처음 목회하던 시절로 돌아가는 것은 어떨까요? 그런데 그것도 좀 문제가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단독목회에 대한 경험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목회하다 보니 시행착오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도 그다지 반갑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보니 돌아갈 때가 마땅하지 않습니다. 과거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면 좋은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면 과거로 돌아간다는 것이 그리 마땅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왜 그럴까요? 지나간 인생에 대한 아쉬움과 후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역시 과거를 생각하면 좀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지난 날에 대해 후회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실 후회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늘 지나간 내 인생을 생각하면 아쉬운 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후회하지 않는 인생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과거를 돌아보며 후회하는 인생을 살 것이 아니라 다가올 미래를 잘 준비하는 인생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후회 없는 인생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실 사람은 과거에 대해 후회하지 않기가 어려운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알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미래를 알 수 있다면 우리는 미리 잘 대비하여 후회하지 않는 인생을 살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우리 스스로는 절대로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결국 지나간 내 인생에 대해 아쉬움과 후회를 갖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았던 사람 가운데 아무 후회가 없는 인생을 사신 분을 한 분만 꼽는다면 그 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서의 삶을 마감하는 마지막 순간에 “다 이루었다”고 외치셨습니다. 이 땅에 살았던 인간 가운데 다 이루었다고 말한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위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도 죽는 순간에는 다들 아쉬워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죽는 순간에도 아무런 후회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아무 후회 없이 인생을 마치신 비결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그런 삶을 사신 비결이 나타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그 어떤 일도 자기 스스로 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19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요한복음 8:28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이 외에도 예수님은 여러 차례 자신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원문을 보면 부정어가 앞에 위치하여 아무것도 스스로 하지 않는다는 부정적인 의미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5장 19절과 30절은 약간 뉘앙스가 다릅니다. 먼저 19절은 생명을 살리는 능력과 심판하는 권세와 관련하여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인 30절은 약간 뉘앙스가 다릅니다. 30절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시기 때문에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예수님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만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도 같은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요한복음 16:23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성령님도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과 성령님은 각자 자기 생각대로 일하거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지 않습니다. 한결같이 상호간에 신뢰와 존중 가운데 일하십니다.

만약 삼위 하나님이 각각 자기 주관대로 일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계획하시고, 성자 예수님은 거부하시고, 성령 하나님은 자신의 판단대로 역사하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 인류구원의 과업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추구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에 “다 이루었다”고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러셨다면 우리는 오죽 하겠습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참 교만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셨는데,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간은 자기 스스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항상 자기 마음대로 인생을 삽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고 나면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그 때가 되면 후회합니다. “내가 왜 그랬을까?”하면서 크게 후회합니다. 후회 없는 인생을 살기를 원하신다면 우선 나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모든 일을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했습니다. 본문 30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예수님은 자신의 뜻대로 하지 않고 자신을 보내신 이, 곧 하나님의 뜻대로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구원자와 심판자로 오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역사의 마지막 날 선한 일을 행한 자에게는 생명의 부활을 주고, 악한 일을 행한 자에게는 심판의 부활을 주실 것입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여기서 선한 일이란 단순히 선한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선한 일이란 하나님을 믿는 일을 가리킵니다. 요한복음 6:29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 곧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선한 일이란 결국 예수님을 믿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나온다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자는 생명의 부활을 경험한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씀을 볼 때마다 기독교의 복음은 의롭지 못하다고 주장합니다. 선하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이유로 생명의 부활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의롭지 못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아주 분명하게 자신의 심판은 의롭다고 하십니다.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어떤 근거에서 자신의 심판은 의롭다고 하십니까? 본문 30절을 주목해서 보십시오.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예수님은 한 번도 자신의 뜻대로 한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옳다면 예수님도 옳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또 이렇게 따져 물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반드시 옳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반드시 옳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의의 기준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제대로 구분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존재하시기 때문에 무엇이 옳은 것인지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표준입니다. 그 분이야말로 의로움 자체이십니다. 그 분의 뜻은 언제나 옳습니다. 우리는 장차 하나님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 법정은 최고의 법정입니다. 하나님은 그 최고의 법정에서 재판하시는 재판장입니다. 그 재판정에서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최고 법정의 결정이 옳은 결정입니다. 인간들이 운영하는 재판정에서는 실수가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실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실수가 없는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뜻대로 심판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대로 심판합니다.

예수님의 인생은 마지막 순간까지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는 인생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 십자가를 지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서 그 고통을 피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특별 진통제를 사용하여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육체적으로도 모진 고통이고, 정신적으로도 말할 수 없는 모욕입니다. 예수님도 그 십자가를 생각하면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만일 아버지의 뜻이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십시오.” 그러나 밤을 지새워 기도하신 후에 주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로 결단합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결국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복종합니다. 그렇게 온전히 순종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무 후회가 없이 인생을 마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흠이 없는 분입니다. 그 분은 온전히 선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도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진정으로 후회없는 인생을 살기를 원하신다면 내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결단해야 합니다. 자신을 너무 신뢰하지 마십시오. 내가 무엇이 된 줄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최고의 자리에서 한 순간에 넘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자신을 지나치게 신뢰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의 인생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많은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그렇게 잘 나가다 보니 하나님은 사라지고 자기가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순간에 넘어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이 한 순간에 넘어진 후에 얼마나 후회하겠습니까? 어느 신학교 교수가 불륜에 빠져서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그 분이 가까운 지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야!” 깊이 후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후회하지 않는 인생을 살려면 하나님께 순종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만 온전히 붙잡고 죽는 날까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 순종하려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 30절을 보시면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다음에 “듣는대로 심판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 위해 예수님은 하나님께 듣기에 힘썼습니다. 그리고 오직 듣는대로 심판하였습니다.

요한복음 5:19을 같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이 말씀에서는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에 얼마나 힘썼는가를 알 수 있는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사탄에게 세 가지 시험을 받았습니다. 사탄은 제일 처음에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유혹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신명기 8:3의 말씀을 인용하여 답변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사탄은 두 번째로 성전 꼭대기로 예수님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 곳에서 사탄은 예수님에게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천사들이 다치지 않게 받들어 줄 것이니 뛰어내리라고 유혹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답변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사탄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말합니다.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그 때 예수님은 신명기 6:13의 말씀을 인용하여 답변하셨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그 때 마침내 마귀가 떠나갔습니다. 사탄의 유혹에 대해 예수님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쳤습니다. 평소에 늘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살았기 때문에 결정적인 유혹의 순간에 말씀으로 승리한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바쁜 사역 일정 중에도 종종 홀로 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새벽 미명에 홀로 산에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입니다. 대체로 여러 사역에 묻혀 지내다 보면 막상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그런 위험성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바쁜 사역의 와중에서도 종종 홀로 산에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한 후에 때로는 사역의 방향을 바꾸셨습니다. 기도한 후에 때로는 12제자를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후,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산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했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에 “다 이루었다”고 승리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으로 후회 없는 인생을 살기 원한다면 내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일평생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대로 살려면 아버지의 말씀에 늘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나 자신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그 본성상 마음에 생각하는 것이 다 악할 뿐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때로는 대단히 성숙한 것 같지만 한 순간에 넘어질 수 있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자신을 믿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만이 내가 붙잡아야 할 참된 진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것이 유일하게 내가 붙잡아야 할 길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는 날마다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매일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말씀을 배우기를 힘써야 합니다.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자신의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중요한 구절은 암송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말씀 안에 완전히 잠겨야 합니다. 그래야 내 뜻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뜻만이 온전히 서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후회 없는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처럼 다 이루었다고 고백하지는 못해도 우리 신앙의 선배들처럼 감사하면서 우리 인생을 마치게 될 것입니다.

빅토르 위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무덤에 들어갈 때에 하루의 일과를 마쳤다고 말할지언정, 내 일생을 마쳤다고는 말하지 않으리라. 나는 그 다음 날에도 여전히 일할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향한 통로이다.”

김활란 박사는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죽거든 눈물을 흘리거나 슬픈 찬송가를 부르지 말라. 그 순간은 내가 천국에 입성하는 순간이다. 모두 기쁘게 승리의 찬송을 불러다오.” 실제로 김활란 박사의 장례식에서는 헨델의 메시야 중, 할렐루야가 울려 퍼졌습니다. 이 땅에서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 자만이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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