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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1-10-03 00:00:00 |
영생을 얻는 길 |
2011년 10월 2일 주일예배 2부 설교 녹음
영생을 얻는 길(요한복음 6:41-51)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얻는 과정은 참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의 가정에서 특별히 의심해 본 적 없이 예수님을 믿는 경우도 있습니다. 반면에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어도 끊임없이 의심하다가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지 않는 가정에서 태어나서 성장한 후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사람에 따라 다양한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처음 찾아간 날 성령의 역사로 예수님을 믿는 경우가 있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오랫동안 교회를 다녀도 쉽게 믿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도 목회를 하면서 예수님을 믿는 과정은 사람에 따라 참 다양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은혜를 받고 급격히 변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또한 오랫동안 탐구하면서 십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믿는 분도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은 일종의 구도의 기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는 것은 그 구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와 관련이 있습니다. 물론 구도의 노력이 없이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예수님을 믿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믿기 위한 구도의 과정을 거쳐서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구도의 과정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까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얻는 바른 길을 보여줍니다. 첫째로 영생을 얻으려면 먼저 불평을 중단해야 합니다. 요한복음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 중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하고 대적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과 대화하는 갈릴리 지역의 유대인들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하시자 유대인들이 수군거립니다. 4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여기서 수군거린다는 말은 불평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말씀하시자 유대인들이 그 말을 듣고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뭐라고 불평합니까? 42절을 보십시오.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지금 유대인들이 불평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갈릴리 지역의 유대인들입니다. 갈릴리는 예수님께서 성장한 곳입니다. 같은 고향사람들이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잘 알기 때문에 불평하였습니다. 잘 알기 때문에 불평한다는 것은 얼마나 이상한 일입니까? 잘 안다면 불평하지 말고 예수님을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들은 잘 알기 때문에 불평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안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이 사람들은 지금 예수님을 잘 알고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아는 것은 예수님의 겉모습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예수님은 분명히 요셉의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단지 요셉의 아들이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런 사실은 알지 못했습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외형만 알았을 뿐 본질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본질은 알지 못한 채 그들은 예수님께 불평한 것입니다. 예수님께 불평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은 그들의 조상들을 닮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끊임없이 하나님께 불평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불평을 듣고 만나를 주셨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만나를 보고 너무 좋아하였습니다.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온 모습을 보고 너무 좋아서 이게 뭐냐고 소리치다가 이름마저 이게 뭐냐, 라고 지었습니다. 그 순간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아무런 먹을 것도 없는 광야에서 만나를 보고 이게 뭐야, 이게 뭐야, 하고 소리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난 뒤에 이들은 이번에는 만나 때문에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만나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는 3단계를 거쳐 변합니다. 일 단계는 너무 좋아하는 단계입니다. 처음에 그들은 이것이 무엇이냐고 외치면서 좋아하였습니다. 이 단계는 그저 그런 단계입니다. 유대인들은 만나를 보고 기름 섞은 과자 같다고 했습니다. 삼 단계는 매우 싫어하는 단계입니다. 유대인들은 만나를 보고 이 박한 식물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게 좋아하던 만나를 보고 불평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고기가 없다고 불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만나가 없을 때는 없다고 불평하고 만나가 있을 때는 만나밖에 없다고 불평하였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두고도 불평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은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했습니다. 만나를 주신 하나님의 심정을 바르게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실 때 그저 만나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금방 싫증을 내게 된 것입니다. 어설프게 아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설프게 알면 불평하고 원망하게 됩니다. 전도를 해 보면 어설프게 아는 사람이 제일 문제입니다. 성경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어설프게 들은 것을 가지고 성경을 비판합니다. 저는 13년 동안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신학공부를 마친 후에도 벌써 10년 이상 매일 성경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성경을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 깊이와 넓이를 감히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한 번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성경을 비판합니다. 성경에 대해서 불평합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입니까? 언제 불평이 나올까요? 불평은 불신에서 나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계속 불평하였습니다. 지금 예수님과 대화하는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역시 예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런 불신에서 불평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믿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불평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평은 불신에서 나오지만 불평하는 것은 태도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주변을 돌아보십시오. 직장동료나 친구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늘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늘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뢰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태도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바른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불평하고 원망하지 않고 탐구하는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불평하는 이유는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떤 상황에 대해서 불평하는 것은 그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불평하는 것은 예수님을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대해 불평하는 이유는 성경을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 대해 불평하는 이유는 기독교를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설프게 알면서 다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불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유대인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수군거리지 말라.” 그 말은 불평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좀 더 정확한 뉘앙스로 말하면 불평하기를 당장에 중단하라는 말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늘 불평하는 분이 있습니까? 예수님에 대해, 기독교에 대해, 성경에 대해 늘 불평하는 분이 있습니까? 불평하기를 당장에 중단하십시오. 여러분이 불평하는 이유는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영생을 얻으려면 진리에 대해 바른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에 불평하기를 중단하십시오. 그것이 영생을 얻는 길로 가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둘째로, 영생을 얻으려면 겸손하게 하나님께 듣고 배워야합니다. 43절에서 수군거리지 말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바로 다음 구절에서 하나님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자신에게 올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43-4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이 두 구절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왜 예수님은 수군거리지 말라고 말씀하신 후 44절의 말씀을 하셨을까요? 먼저 우리는 아버지께서 이끄신다는 말씀에 대해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끄신다는 말은 폭력적인 방식으로 억지로 이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말씀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배우기를 힘써야 합니다. 4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억지로 이끌지 않습니다. 그 분은 당신의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예수님께로 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과 예수님을 믿는 것은 결코 끊을 수 없는 긴밀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불평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불평하지 말고 겸손히 배우라는 말입니다. 영생을 얻기 원한다면 불평하지 말고 겸손히 배우기를 힘써야 합니다. 예레미야 31:33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은 단지 돌판에만 율법을 새겨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법을 우리의 속에 두고 우리의 마음에 기록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열고 겸손히 배우려는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에스겔 36:26-27에서 하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하나님은 우리의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다면 말씀대로 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복이 있다. 이것을 네게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다.”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억지로 이끌지 않고 우리 마음을 성령의 빛으로 조명하여 우리를 깨우쳐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히 배우기를 힘써야 합니다. 지금은 신약시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그 분은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이십니다. 오직 예수님외에는 아무도 하나님을 본 자가 없습니다. 46절 말씀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표준새번역은 이 구절을 이해하기 쉽게 번역하였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본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만이 아버지를 보았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 분만이 우리의 중보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 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주목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아버지의 마음을 배우는 자만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계시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는 것, 그것이 바로 영생에 이르는 두 번째 길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히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씀을 듣는다는 말은 단순히 귀로 듣는 것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귀로 듣는다고 해서 듣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에 있는 선한 목자의 비유에서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고 했습니다. 거기서 듣는다는 말은 순종한다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엄마의 말을 거역하는 아들에게 엄마가 뭐라고 합니까? “너 엄마 말 들을거야 안 들을거야?”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거기서 듣는다는 말은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엄마 말을 듣지 않는 자녀가 어디 있겠습니까? 듣기야 다 듣습니다. 순종하지 않는 자녀가 있을 뿐입니다. 예배시간에 설교를 듣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다같이 앉아서 설교를 들어도 귀로만 듣는 사람이 있고, 마음으로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으로 듣는 자만이 삶에서 실천할 수 있습니다. 영생을 얻으려면 마음을 열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마음을 열고 말씀을 듣고 배우는 자만이 순종하는 자리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자가 영생을 얻습니다. 셋째로, 영생을 얻으려면 믿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는 사람은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에 힘써야 합니다. 마음을 열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움직여서 깨닫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실 때, 그 때 믿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요한복음은 반복적으로 믿는 자가 영생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선택교리를 가르치는 순간에도 믿는 자가 영생을 얻는다고 선포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으로 시작되지만 결국 믿음은 우리의 결단이고 우리의 선택입니다. 요한복음 3:15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16입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36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5:24입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6:35입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6:47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6:58입니다.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7:38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우리 예수님은 생명의 떡입니다. 생명의 떡이란 생명을 주는 떡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믿는 자가 영생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결단해야 합니다. 48-5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육신의 떡을 먹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해도 만나는 우리 육신을 살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물질의 복을 아무리 많이 받아도 그것이 우리를 영원토록 살게 하지 못합니다. 오직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인 예수 그리스도만이 생명의 떡입니다. 오직 그 생명의 떡만이 우리를 죽지 않게 합니다. 5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오직 예수님만이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입니다. 그러므로 그 떡을 먹는 자는 영생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떡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킵니까? 51절의 마지막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예수님께서 주실 떡은 자신의 살입니다. 여기서 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살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육신이 되신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육신과 살은 원문에서 같은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육신을, 자신의 살을 십자가에서 내어주셨습니다. 51절에서 굳이 내가 줄 떡이라고 미래시제로 표현한 이유는 십자가를 의도하신 것입니다. 아직 십자가를 지기 전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내가 줄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육체를 온전히 내어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모진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자가 영생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믿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우리 마음을 움직여 말씀을 깨닫게 하셨다면 더 이상 망설이지 말고 결단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억지로 폭력적으로 끌고 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결단하고 믿어야 합니다. 결단을 미루지 마십시오. 언젠가 되겠지, 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마음을 열어 말씀을 깨닫게 해 주셨다면 이제 믿음으로 결단하십시오. 믿는 자가 영생을 얻습니다.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미루지 마십시오. 찬송가 작사가로 널리 알려진 화니 제인 크로스비는 생후 6개월만에 의사의 잘못된 처방으로 실명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절망하여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하고 아이를 믿음으로 기르기 시작했습니다. 크로스비가 30세가 되었을 때, 예배시간에 찬송가를 듣다가 깊은 은혜를 체험합니다. “웬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찬송을 듣는 동안 그 찬송의 가사가 크로스비의 마음에 파고 들었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위해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믿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크로스비는 결국 그 날 그 찬송가 가사처럼 이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친다는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크로스비는 자신에게 시를 쓸 수 있는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고 바로 일어나서 작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제일 처음 작사한 찬송이 바로 찬송가 321장에 있는 ‘자비한 주께서 부르시네’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깨닫고 보니 그 사실을 전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크로스비는 사람들에게 간절히 호소합니다. 자비한 주께서 부르시네 부르시네 부르시네 사랑의 햇빛을 왜 버리고 점점 더 멀리 가나 지금 오라 지금 오라 자비한 주께로 지금 곧 나아오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깨우쳐 주셨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결단하십시오. 지금 믿기로 결단하십시오. 믿는 자는 영생을 얻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