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이민숙 | ||
조회수 | 1445 | ||
작성일 | 2016-01-04 09:32:29 |
다 준행하였더라 |
다 준행하였더라(창세기 6:9-22; 히브리서 11:7)
2016년 새해 첫 주일예배인 신년감사예배에서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우리 옆자리에 계신 분들과 한 번 더 인사할까요? “새해에 신령한 복 많이 받으십시오.” “복음 안에서 코이노니아합시다.” 2016년 주일낮예배에서는 주로 인물별 강해설교를 할 예정입니다. 신구약성경에 나오는 다양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설교할 계획입니다. 또한 수요예배에서는 창세기 강해설교를 할 예정입니다. 작년 수요예배에서는 주로 신약의 책들을 중심으로 설교했기 때문에 말씀의 균형을 위해 올해 수요예배에서는 구약성경의 창세기 강해설교를 하겠습니다. 창세기는 50장으로 이루어진 긴 책이기 때문에 아마 거의 일 년 내내 다루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중간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다른 주제로 잠시 설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새벽예배의 경우는 교역자들의 새벽예배 설교원고 전체를 매일 밴드와 홈페이지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설교자들의 입장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설교자들 스스로 말씀과 기도의 훈련을 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또한 말씀묵상하는 성도들에게도 유익할 것 같아서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2016년에도 주일과 수요일에, 그리고 매일 새벽마다 이 강단에서 생명의 말씀이 선포될 수 있도록 여러분들이 함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첫 번째 인물로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를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구약의 창세기와 신약의 히브리서, 두 곳입니다. 창세기가 노아의 사건 자체를 다룬다면 히브리서는 노아를 믿음이라는 시각으로 해석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저는 히브리서의 해석을 중심으로 창세기의 기록을 함께 살펴보면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먼저 히브리서 11:7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히브리서는 노아의 믿음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첫째,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였습니다.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6:11을 보면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했다고 했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이기적 욕심을 따라 문명을 발전시켰고, 그 결과 세상은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살육이 난무하는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성경은 부패함과 포악함이 땅에 가득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런 현실을 보며 하나님은 세상에 사람 창조한 것을 한탄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대홍수로 세상을 심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미리 그런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경고한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대홍수가 날 것이므로 커다란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이런 대홍수는 이전에 단 한 번도 벌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노아의 입장에서 이것은 당연히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아니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노아는 바로 그 보이지 않는 일에 대해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 경고를 받고 노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곧 방주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경외한다는 말은 ‘잘 붙잡는다.’ 혹은 ‘조심스럽게 붙잡는다.’라는 뜻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듣고 신중하게 그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시하신대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창세기 6:14-16에는 방주를 만드는 법이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먼저 하나님은 고페르나무로 방주를 만들라고 했습니다. 고페르나무가 어떤 나무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대부분의 영어성경과 우리말성경들은 원어의 발음 그대로 고페르나무라고 옮겼습니다. 방주를 만들 때는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고 했습니다. 역청이란 것은 말하자면 천연 아스팔트와 같은 것입니다. 중동지역에는 역청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방주는 어마어마하게 컸습니다. 창세기 6:15은 그 규모를 길이가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그리고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고 소개합니다.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길이가 135m, 너비가 22m, 그리고 높이가 13m에 이르는 거대한 배입니다. 우리가 연상할 수 있는 크기로 환산하면 농구장 20개를 두 줄로 배열한 것과 같습니다. 총 적재량은 43000톤에 달합니다. 방주 위쪽에는 창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7:16에 보면 그 창을 하나님이 닫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방주에 탄 자들을 지키신다는 뜻입니다. 방주에는 키나 돛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방주의 운명이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달려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이런 방주를 건축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런 방주는 현대적인 기술을 동원한다고 해도 만들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노아에게 이런 방주를 만들라고 지시했습니다. 노아는 그 명령에 순종하여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히브리서는 그런 노아를 가리켜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였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대홍수를 대비하여 이런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실 대홍수가 언제 날지 알 수도 없습니다. 얼마나 큰 홍수가 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표현한대로 그것은 보이지 않는 일입니다. 보이지도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고 노아는 이런 어마어마한 역사를 감당한 것입니다. 창세기 6:22에는 노아의 순종을 잘 보여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같은 구절을 새번역은 이렇게 옮겼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다 하였다. 꼭 그대로 하였다.” 히틀러가 독일의 권력을 장악하고 전 세계 정복의 야망을 꿈꿀 때, 독일에서는 저항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 저항운동의 중심에는 본회퍼라는 젊은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당시 본회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두 가지 존재 방식에 의해서만 성립됩니다.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정의를 실현하고자 행동하는 일이 그것입니다.” 본회퍼는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바라고 주장했습니다. 굳이 본회퍼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성경은 자주 우리에게 행동하는 믿음, 곧 순종하는 믿음을 가르쳐줍니다.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역설했던 바울 사도도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여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을 강조했습니다. 노아는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다 순종하였습니다. 꼭 그대로, 하나님이 시키신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그대로 순종하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둘째, 노아는 자신의 가족들을 구원하기 위해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창세기 6:18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하나님은 세상을 물로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시면서 노아와 그의 가족들에게는 방주를 만들어 방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노아는 그 명령대로 다 준행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1:7은 노아가 방주를 만든 목적이 그 집을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집은 당연히 건물이 아니고 가족을 가리킵니다. 노아는 자기 가족을 구원하기 위해 방주를 만든 것입니다. 개역성경을 비롯한 우리말 번역은 대체로 가족 구원을 결과처럼 번역했지만 영어성경들은 대체로 목적으로 번역했습니다. 원문을 볼 때 결과보다는 목적이 더 합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노아의 행동은 단지 자기 가족만을 구원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후손들이 온갖 악한 일만 행하는 것을 보고 세상을 완전히 멸망시키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셋의 후손인 노아가 의로운 삶을 사는 것을 보고 그를 통하여 세상을 새롭게 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노아가 방주를 만들어 자기 가족을 구원한 것은 단지 좁은 의미에서 자기 가족만 구원한 것이 아닙니다. 노아는 자기 가족만 구원한 것 같지만 사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새롭게 세워나가는 구속사적 사명을 감당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후손을 통하여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때로는 내 노력이 겨우 가족구원에만 그치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겨우 내 친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에 그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는 겨우 내 주변에 있는 몇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돕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어떻게 사용하실지 모릅니다. 내가 구원에 이르게 한 그 한 사람이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저 외국에 일주일짜리 단기선교가서 한 영혼에게 복음의 씨앗을 뿌렸을 뿐인데 뿌려진 씨앗이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일은 결국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역사를 계승해 나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일에 순종한 결과는 세상이 정죄를 받은 것입니다. 다시 히브리서 11:7을 주목해 보십시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그 말씀의 끝부분을 보십시오.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라는 말씀이 있지요. 노아는 본래 세상을 정죄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다만 자기 가족을 구원하기 위해 방주를 만들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 세상은 정죄를 받았습니다. 다시 창세기 6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11-12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두 구절에 부패했다는 단어가 세 번 반복됩니다. 여기서 부패했다는 단어를 히브리어로 ‘샤하트’라고 합니다. 창세기 기자는 이 샤하트라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여 인간의 부패상을 드러냅니다. “온 땅이 부패하여, 땅이 부패하였으니,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하였더라.” 그런데 한 가지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다음에 있는 13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이 구절의 마지막에 있는 ‘멸한다’는 단어도 바로 샤하트입니다. 앞에 나온 ‘부패하다’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인간의 멸망은 인간 스스로가 자초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멀쩡한 인간을 심술로 멸망시킨 것이 아닙니다. 샤하트하고 샤하트하여 샤하트하였더니 결국 샤하트한 것입니다. 부패하고 부패하여 부패하였더니 결국 멸망당한 것입니다. 샤하트하면 샤하트합니다. 부패하면 파멸합니다. 노아는 그들을 정죄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들을 정죄하여 멸망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3:20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하나님은 부패한 자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오래 참으셨습니다. 방주는 하루아침에 건설된 것이 아닙니다. 농구장 20개에 달하는 배를 무슨 재주로 하루아침에 건설하겠습니까? 노아와 그 가족들이 방주를 건설하는 긴 세월 동안 하나님은 그 백성이 회개하기를 오랫동안 기다리셨습니다. 오래 참으셨습니다. 그러나 당시 가인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했습니다. 부패하고 부패하여 부패했다가 결국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멸망은 하나님의 의도나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만 인간이 부패하여 스스로 자초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온 땅이 부패하여 파멸하는 순간에도 노아와 그의 가족은 구원받았습니다. 창세기 6:9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이 말씀은 세 가지로 노아를 칭찬합니다. 첫째로, 노아는 의인이었습니다. 여기서 의인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충실히 지키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둘째로, 노아는 완전한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완전하다는 말은 당대의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완전하다는 뜻입니다. 셋째로,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에녹처럼 노아도 하나님과 늘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노아의 삶을 보면 우리는 당대의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의 부패로 인하여 파멸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파멸은 인간 스스로가 자초하는 것입니다. 넷째, 이 모든 순종의 결과로 노아는 결국 의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1:7의 마지막에 보면 노아는 결국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노아는 아직 보지도 못한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경고를 받아 그 말씀을 붙잡고 순종하였습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대홍수를 대비하여 거대한 방주를 만들라는 말씀을 경외함으로 순종하였습니다. 그 결과 노아는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의 고백을 떠오르게 합니다. 로마서 1:17에서 바울은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런데 사실 이 말은 바울만 선포한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0:38에서 히브리서 기자도 동일한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런데 로마서의 말씀과 히브리서의 말씀은 약간 뉘앙스의 차이가 있습니다. 바울은 행위구원론을 주장하는 율법주의자들에 대항하여 오직 믿음으로 의를 얻는다는 대원칙을 천명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오히려 믿음의 순종을 강조하는 의미로 이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여기서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바로 노아와 같은 경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노아는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노아는 보이지 않는 일에 대해 경고를 받고 그 말씀에 온전히 순종했습니다. 만약 노아가 말로는 순종한다고 말하고 실제로 방주를 짓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 믿음이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구원했겠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가 강조하는 믿음은 바로 구체적으로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삽니다. 노아는 믿음으로 순종하여 의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노아의 삶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예표가 됩니다. 오직 믿음으로 산 사람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말씀을 굳게 붙잡고 온전히 순종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창세기와 히브리서가 노아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믿음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결국 순종입니다. 오늘 본문인 창세기 6장의 마지막 절은 노아가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다고 기록합니다. “다 준행하였더라”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 준행하였습니다. 온전히 순종하였습니다. 믿음이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비록 아직 벌어지지 않은 사건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믿고 순종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향한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성경의 인물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 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고 본토와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입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떠나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히브리 백성을 애굽땅에서 건져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으로 인도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모세는 그 약속을 믿고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바로와 맞서 싸웠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에 들어가는 것은 미래의 일입니다. 그러나 그 미래에 주어질 약속을 믿고 모세는 지금 당장 바로와 싸워야 했습니다. 믿음이란 그런 것입니다. 믿음이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이 내게 주신 그 약속을 붙잡고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고 순종할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약속만 믿고 고향을 떠날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가나안땅에 들어가게 해 주겠다는 약속만 믿고 안락한 삶을 포기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있으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인생이 아니시기 때문에 후회가 없습니다. 그 분이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겠습니까? 그 분이 어찌 약속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 다 준행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은 순종으로 표현됩니다. 노아처럼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다 준행하는 사람이 바로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올 한해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대로 다 준행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할 수 없다고 핑계하지 말고 오히려 날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순종해 보십시오. 그럴 때 우리도 노아처럼 다음 세대를 살리는 구원의 사명을 감당하고 의의 상속자, 구원의 상속자가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주신 이 축복의 말씀대로 올 한해 주님의 말씀을 다 준행하여 믿음의 승리자가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