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이세라
조회수 1083
작성일 2016-01-17 13:02:56
인생의 여리고를 만났을 때

인생의 여리고를 만났을 때(여호수아 6:1-7)

 

  우리는 대부분 평탄한 인생길을 걷기 원합니다. 인생의 시련과 고난을 많이 겪으며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시련과 고난이 없는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나 살다보면 인생의 장애물을 만납니다. 가벼운 장애물이라면 즐기는 마음으로 통과할 수도 있습니다. 지나치게 밋밋한 인생보다는 나름대로 재미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내 힘으로 넘을 수 없는 고통스런 장애물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누구나 한두 번은 그런 인생의 장애물을 만납니다. 심각한 육신의 질병이나 죽음의 문제는 우리의 힘만으로는 통과하기 어려운 장애물입니다. 살다 보면 매사에 넘치는 자신감으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던 사람이 갑자기 질병이나 사고와 같은 인생의 장애물을 만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인생의 장애물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세등등하게 여리고성까지 왔습니다. 여리고성에 올 때까지 그들은 여러 난관을 헤쳐 나왔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40년간의 광야생활에서는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고 반석에서 물이 나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진군하는 길을 가로막고 있던 요단강의 물이 멈추는 기적도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담대하게 가나안 땅을 향해 진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앞에는 가나안으로 진입하는 관문인 여리고성이 마치 넘을 수 없는 장벽처럼 굳게 서 있습니다. 1절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직면한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여리고성은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따라서 이 성을 정복하지 않고는 가나안땅에 진입할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잘 조직된 군대를 보유하고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변변한 무기도 없습니다. 이집트의 노예로 살다가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했습니다. 그 사이 일 세대들은 대부분 죽었고, 이제 광야에서 태어난 2세대들이 가나안땅에 진입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관문에 철옹성처럼 큰 성 여리고가 버티고 서 있습니다. 변변한 무기도 없는 오합지졸로 구성된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여리고성이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여리고성은 난공불락의 요새가 아닙니다. 단지 그들의 눈에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1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이 말씀을 보면서 여리고성을 철옹성처럼 버티고 있는 난공불락의 성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관점을 달리하면 지금 여리고성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포위된 것이기도 합니다. 여리고성의 주민들은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 성문을 굳게 닫고 떨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성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마찬가지로 여리고성의 주민들도 밖으로 나올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맞닥뜨리는 인생의 장애물에도 이런 측면이 있습니다. 도저히 통과할 수 없는 엄청난 장애물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관점을 달리 하면 사실은 우리의 성숙을 위한 적합한 도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여리고성을 만났을 때 하나님이 명하시는 바른 태도를 취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인생의 여리고를 만났을 때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인생의 여리고를 만났을 때 우리가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바로 앞에 있는 여호수아 5장의 내용을 한 번 살펴보십시오. 여호수아 5장에는 두 가지 내용이 나옵니다. 한 가지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할례를 받은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군대 대장 앞에서 신을 벗은 것입니다. 이 두 가지 행동은 모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본래 하나님과의 언약에 따라 할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할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리고성 전투에 돌입하기 전에 먼저 언약백성의 상징인 할례를 받은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또한 여호와의 군대 대장을 만나서 그에게 엎드려 절하고 그의 명령대로 발에서 신을 벗습니다. 이 두 가지 행동은 모두 이 전쟁이 하나님께 달린 것임을 이스라엘이 인정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만약 이 전쟁이 자신들의 군사력에 달렸다고 믿는다면 지금 이스라엘이 할 일은 할례가 아닙니다. 할례를 받으면 상처가 나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단지 군사력의 측면으로만 본다면 전쟁을 치를 군인들에게 할례를 행하는 것은 미친 짓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할례를 시행합니다. 무엇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지금 여호수아는 이 전쟁의 승패가 하나님께 달려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 여호수아의 행동을 보고 하나님은 군대 대장을 보내 응답하십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라.”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정립한 후에 여리고성 정복전쟁을 시작합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여리고성 전쟁을 목전에 두고 여호수아는 다시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본문 2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으니” 여리고성 전투를 앞두고 여호수아가 제일 먼저 한 일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입니다. 왜 여호수아는 전쟁을 앞두고 하나님을 바라봅니까? 그 이유는 사실상 전쟁은 하나님께 달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리고성을 이스라엘에게 넘겨주겠다고 말씀하시면 이미 전쟁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제일 먼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입니다. 

     

  본문을 계속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본문 3-5절을 보겠습니다. “3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4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5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모든 군사들에게 매일 성을 한 번씩 돌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그 때 제사장 일곱은 일곱 개의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가라고 했습니다.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게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면 다함께 함성을 지르라고 하셨습니다. 상식적으로 볼 때는 잘 납득이 되지 않는 작전입니다. 전쟁을 하려면 작전을 잘 짜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런 작전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전쟁을 치러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저 성 주위를 돌라고 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이 전쟁의 승리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쟁수행능력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께 달린 것임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본문을 주의해서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군하는 곳에 언약궤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4절에서는 제사장들이 언약궤 앞에서 행하라고 했습니다. 6절에서는 좀 더 자세하게 묘사합니다. 일곱 명의 제사장들이 언약궤의 앞에서 행군하고 다른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갑니다. 9절을 보면 언약궤의 뒤에는 후군이 따릅니다. 13절은 이 모든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계속 행진하며 나팔을 불고 무장한 자들은 그 앞에 행진하며 후군은 여호와의 궤 뒤를 따르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진하니라.” 

     

  이 행군의 대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언약궤입니다. 언약궤를 중심에 두고 앞뒤로 제사장들과 군인들이 늘어선 대형으로 행군을 합니다. 언약궤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이런 사실을 더욱 확실히 하기 위해 6절에서는 언약궤를 아예 ‘여호와의 궤’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여호와의 궤를 중심에 두고 행군하는 것은 이 전쟁이 하나님께 달렸다는 신앙고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본문에는 7이라는 숫자가 많이 나옵니다. 제사장 일곱 명이 일곱 개의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가며, 일곱 째 날에는 성을 일곱 번 돌라고 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7은 완전수이며 하나님의 수입니다. 이 사건에서 하나님의 수인 7이 계속 강조되는 것은 이 전쟁이 온전히 하나님께 달린 전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큰 위기를 만났습니다. 가나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굳게 닫힌 여리고성이 길을 막고 있습니다. 그 성을 무너뜨리지 않고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 상황에서 하나님은 여호와의 궤를 중심에 두고 하나님의 수인 7을 계속 상기시키며 행군하게 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전쟁의 승패가 온전히 하나님께 달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승리는 온전히 하나님의 역사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홍해가 갈라진 일,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은 일, 반석에서 난 물을 마신 일, 요단강 물이 마른 일 등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주 하나님의 역사를 망각합니다. 지난 세월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로 인생의 장애물을 극복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인생의 장애물을 만나면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것을 쉽게 망각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 우리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인생의 여리고를 만나셨습니까? 도무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낙심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선 모든 일을 내려놓고 하나님만 바라보십시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일에 내 시간과 에너지를 집중해 보십시오. 지난 날의 경험을 떠올려 보십시오. 지금까지 인생의 여리고를 내 힘과 능력으로 정복한 적이 있었습니까? 그 동안에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어려움을 극복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지금 이 순간도 나와 함께 계시는 살아계신 하나님만 바라보십시오. 말씀을 통해 주님의 인도를 따르시길 바랍니다. 기도 가운데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시련이 극심할수록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여리고를 만났을 때 우리가 두 번째로 해야 할 일은 침묵하는 것입니다. 10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 이 장면을 한 번 가만히 상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용히 침묵하면서 성을 돕니다. 오로지 들리는 것은 나팔소리 뿐입니다. 나팔소리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팔소리는 하나님의 행동개시 명령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천사장의 나팔 소리와 함께 오신다고 했습니다. 그 때 천사장의 나팔소리는 하나님이 역사 속에 개입하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개입을 알리는 나팔소리만 울려 퍼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소리를 들으며 하나님께서 여리고성 정복전쟁에 개입하고 계신다는 것을 확신했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침묵을 요구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나팔소리를 통해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자유롭게 떠들면서 성을 돌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그들은 대부분 나팔소리를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혹은 들었다고 해도 나팔소리에 담긴 의미를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7일 동안 여리고성을 모두 13번이나 돌았습니다. 성을 돌면서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아무리 성을 돌아도 전혀 변화가 없는 성을 보면서 절망적인 생각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만약 자유롭게 말하게 두었다면 아마 그들은 원망과 불평의 말, 불신의 말을 쏟아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아마 그들은 나팔소리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침묵하게 하셨습니다. 지금 인생의 위기 상황 가운데 있습니까? 인생의 여리고를 만났습니까? 그렇다면 침묵하십시오. 입을 다물고 조용히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A. W. 토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경건훈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침묵의 훈련이다. 왜냐하면 침묵을 배우지 않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인생의 여리고를 만났을 때 우리가 할 일은 목소리를 높여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때 우리가 할 일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나팔소리를 들으며 그 나팔소리에 담긴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만났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 14:13).” 그 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였습니다. 여리고성을 도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침묵하였습니다. 입은 다물고 오직 눈으로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를 바라보고, 귀로는 하나님의 개입을 알리는 나팔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반드시 승리하게 하실 것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지금 곤란한 상황에 처했습니까? 인생의 막다른 길목에 몰렸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입은 다물고 귀를 열어 하나님의 음성에, 그 말씀에 집중하시기를 권면드립니다. 주님의 음성,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새 힘과 새 소망을 반드시 얻게 될 것입니다.

     

  인생의 여리고를 만났을 때 우리가 세 번째로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명령에 끝까지 순종하는 것입니다. 6일 동안은 매일 한 번씩 돌고, 마지막 7일째에는 성을 일곱 번 돌라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면 그 때는 큰 소리로 외쳐 부르라고 했습니다. 본문 20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 언제 여리고성이 무너졌습니까? 7일째에 일곱 번을 돌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고 백성들은 크게 소리 질러 외쳤습니다. 여리고성의 성벽은 그 때 비로소 무너졌습니다. 무엇을 가르쳐주는 것입니까? 끝까지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순종이라는 말입니다. 끝까지 순종할 때, 그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당장에 조짐이 보이는 것을 좋아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첫째 날 한 바퀴를 돌았을 때 벽돌이 한 두 개라도 떨어지고, 둘째 날 두 바퀴째를 돌았을 때는 벽돌이 십여 개가 떨어지고, 셋째 날에는 한 쪽 벽이 흔들린다면 우리는 좀 더 쉽게 믿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역사는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루에 한 번씩 6일 동안 매일 돌아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7일째에 여리고성을 여섯 번을 돌아도 그 때까지도 아무 변화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마지막 일곱 번째로 성을 돌았어도 성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일곱 번 성을 돌고 온 백성들이 함성을 질렀을 때 비로소 그 때 여리고 성벽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마지막까지 순종하는 것이 진짜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온전한 순종입니다. 침묵하라고 할 때는 침묵하고 소리를 지르라고 할 때는 소리를 질러야 합니다. 벽돌 한 개 떨어지지 않아도 끝까지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순종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여리고는 무엇입니까? 부모님의 구원을 위해 오랫동안 기도했는데 아직도 부모님이 마음을 열지 않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가족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데 가족 구원이 이루어질 것 같은 조짐이 전혀 없습니까? 재정적인 위기상황이 언제 끝날지 몰라서 늘 무엇엔가 눌린 것처럼 답답하십니까? 학위과정을 공부하는 데 도무지 언제 끝날지 그 끝이 보이지 않아 힘드십니까?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싶은데 배우자와 계속 갈등상황이 지속되어서 괴로우십니까? 육신의 질병을 고쳐주시도록 기도하고 있는데 병이 점점 더 깊어지고 있습니까? 명절 때마다 가족들과 여러 다툼이 있어서 힘드십니까? 직장의 일로, 인간관계로, 사업의 어려움으로 혹은 안정된 일자리를 찾지 못하여 눈앞이 캄캄하십니까? 지금 여러분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여리고는 과연 무엇입니까? 

     

  지금 여리고가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앞을 가로막고 있다면 조용히 눈을 들어 우리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원망과 불평, 의심을 내려놓고 조용히 우리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 주님만 바라보십시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시기 바랍니다(히 4:15-16).” 아무리 큰 여리고가 우리 앞을 막고 있다고 해도 그 여리고에 압도당하여 주님을 놓치고 방황하지 마십시오. 

     

  문제는 너무 크고, 그에 따른 절망은 너무 고통스러워 믿음을 지키기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여전히 소망 중에 말씀과 기도로 사는 것은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럴지라도 더욱 눈을 들어 우리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밖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아니, 우리 주님만이 유일한 소망입니다. 조용히, 그리고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말씀에 끝까지 순종해 보시기 바랍니다. 결코 중도에 포기하지 마십시오. 다 그만 두고 싶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기도해도 응답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7일 째에 일곱 번 돌고 함성을 질렀을 때 여리고성이 무너졌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지금까지 믿음으로 순종해 왔다면 조금만 더 힘을 내어 끝까지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의 음성만 들으며 끝까지 순종하면 반드시 여러분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여리고가 무너질 것입니다. 힘을 내어 끝까지 순종하길 다짐하는 여러분에게 성령님이 특별한 임재와 능력으로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이번 한 주도 오직 이 말씀대로, 이 믿음으로 사실 수 있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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