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이세라 | ||
조회수 | 811 | ||
작성일 | 2016-01-31 13:04:22 |
한 걸음의 순종이 믿음입니다 |
아브라함의 믿음(창 12:1-4)
‘아브라함의 믿음’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건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사건입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닌 분들은 아마도 자신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한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여러 차례 설교를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설교는 우리 마음에 감동을 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절망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자신의 아들을 제물로 바칠 수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나같은 사람은 도저히 흉내도 낼 수 없겠다는 절망적인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믿음을 생각할 때 대뜸 이삭을 바친 믿음을 보면서 아브라함을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은 성경을 대하는 바른 관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단판승부가 아니라 긴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그의 생애를 전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이 강조하는 포인트를 정확히 통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창세기 12장부터 시작하여 아브라함의 생애를 대략적으로 살펴보면서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본문 1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보여주실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세 가지를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가만히 보면 뒤로 갈수록 더 떠나기가 어려워집니다. 고향을 떠나는 것보다 친척을 떠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친척을 떠나는 것보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 그 모두를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내가 네게 보여준 땅”으로 가라고 하지 않고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이 말이 무조건 아무 곳으로나 가라는 말은 아닙니다. 이 말은 장래가 보장되어 있지 않은 곳으로 가라는 뜻입니다.
1절이 떠나라는 명령이라면 2-3절은 아브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본문 2-3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하나님의 약속은 크게 네 가지입니다. 첫째,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룬다. 둘째, 내가 너에게 복을 준다. 셋째, 내가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한다. 넷째, 너는 복이 될 것이며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할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떠나라는 명령과 함께 이런 놀라운 약속도 주셨습니다.
이에 아브람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4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갑니다. 이 때 아브람의 나이가 75세였습니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가는 것이 쉽지 않은 나이입니다. 게다가 가나안땅에는 이미 다른 족속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오직 말씀만 따라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부르실 때 그는 온전히 순종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황당한 일이 벌어집니다. 창세기 12:10-13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10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11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12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13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아브람은 얼마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났습니다. 아무런 보장도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만 붙잡고 순종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다음에 자기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입니다. 저는 이런 말씀을 볼 때마다 내가 그래도 아브람보다는 나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위로가 됩니다.
왜 성경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을까요? 이렇게 부정적인 내용은 빼 버리면 좋지 않을까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 대해서는 좋은 이야기만 기록하면 훨씬 더 좋지 않을까요? 왜 성경은 이렇게 믿음의 위인들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그것이 우리 인간의 민낯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본래 그런 존재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처음부터 특별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도 역시 자기 목숨을 지키려고 아내를 팔아먹으려 했던 자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믿음의 여정을 시작했지만 금방 인간적인 술수를 써서 위기를 극복하려고 하는 그런 사람에 불과합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주일날 말씀을 듣고 큰 은혜를 받아 그 말씀대로 살겠다고 결심하지만 바로 주중에 넘어지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넘어진 아브람을 버리지 않고 다시 찾아가십니다. 어떻게 찾아가십니까? 하나님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려간 바로의 집에 재앙을 내리십니다. 하나님이 바로의 집에 재앙을 내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실 엄밀히 말하면 이 사태는 아브람의 잘못 때문이지 바로의 잘못 때문이 아닙니다. 아브람이 누이동생이라고 했기 때문에 바로가 데려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바로의 집에 재앙을 내렸습니까? 그것은 바로 아브람과 맺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겠다.” 하나님은 자신이 하신 약속을 그대로 지키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아브람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배우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하신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한 분이라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배워가기 시작합니다. 이제 창세기 13:14-18을 같이 보겠습니다. “14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15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16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17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18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다시 한 번 약속하십니다. 이번에는 땅에 대한 약속입니다. 12장에서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큰 민족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에 아브람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습니다. 이제 아브람의 삶에 구체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제 아브람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함께 보겠습니다. 창세기 14:11-16을 같이 보겠습니다. “11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12소돔에 거주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13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알리니 그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주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사람들이더라 14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15그와 그의 가신들이 나뉘어 밤에 그들을 쳐부수고 다메섹 왼편 호바까지 쫓아가 16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 이 말씀은 이런 내용입니다. 북부사해동맹국들이 자신들에게 반역을 시도한 소돔지역의 왕들과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 전쟁으로 소돔지역에 살던 아브람의 조카 롯도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아브람은 자신의 부족에서 훈련받은 군사 318명을 거느리고 밤에 적을 기습합니다. 쉽게 말해서 병력이 부족하니 야간기습작전을 편 것입니다. 이 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아브람은 빼앗겼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습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보았던 사건과 한 번 비교해 보십시오. 아브람은 얼마 전에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해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였습니다.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해 아내를 버리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 아브람이 이제는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북부사해동맹국들을 기습하여 자기 조카를 구해옵니다. 아브람이 이렇게 달라진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브람은 자기 아내를 버리려고 했던 그 사건을 통하여 신실하신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자신이 처음 들었던 그 하나님의 약속이 결코 빈 말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자신을 복의 근원으로 삼아서 자신을 축복하는 자에게는 복을 내리고 자신을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를 내리겠다고 하신 그 약속이 실제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신실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경험한 것이 그를 이렇게 바꾸었습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변화될까요? 우리의 굳은 의지로 변화될까요? 예, 물론 굳은 의지가 있으면 어느 정도 변화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의지가 우리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의 의지를 너무 신뢰하지 마십시오. 자신을 지나치게 신뢰하는 사람은 결국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변화시킬까요?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의지할 대상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삶에서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경험하면 조금씩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 가운데 서게 됩니다. 이제 창세기 15:1-6을 같이 읽겠습니다. “1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2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3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4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5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다시 한 번 약속하십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아브람은 약간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하나님, 저는 이 나이 먹도록 자식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식도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저를 통해 큰 민족을 이룬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씨를 안 주셨으니 저는 우리 집 종인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고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 하늘을 보라. 저 수많은 별들을 네가 셀 수 있겠느냐? 네 자손이 저렇게 많을 것이다.” 그러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품게 됩니다. 아브람은 분명히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었고, 이에 여호와께서 그것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람의 믿음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창세기 15:9-11을 보겠습니다. “9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 10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가져다가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11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아브람이 제물을 준비하여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내용입니다. 지금 아브람은 하늘의 별처럼 셀 수 없는 자식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온전히 믿지 못하는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언약을 맺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사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사실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믿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생각이 다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아니 정직하게 말하면 이해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때 다 이해하지 못해도 우리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획을 온전히 다 이해하고 믿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제한된 지성을 가진 인간이 전능자의 계획을 다 이해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은혜를 베풀어 주실 때 그 은혜를 믿고 순종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조금 전에 읽은 말씀은 고대인들이 계약을 맺는 방식을 잘 보여줍니다. 먼저 제물로 쓸 짐승을 잡아서 둘로 쪼개어 놓습니다. 그리고 계약을 맺는 두 당사자가 그 제물 사이로 지나가면서 계약 내용을 말합니다. 그것은 계약을 어기는 사람은 이 짐승의 신세가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15:17을 보면 해가 져서 어두울 때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타는 횃불은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지금 계약을 맺는 두 당사자는 하나님과 아브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람을 깊이 재워 놓고 혼자서 그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갑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지금 아브람과 일방계약을 맺은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과 아브람이 쌍방계약을 맺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브람이 그 계약을 어겼을 때 아브람은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쌍방계약이 아닌 일방계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일방계약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기 전에 우리의 약속을 다짐 받고 십자가형을 집행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저 일방적인 은혜로 사랑하는 아들에게 십자가를 지우고 그 은혜의 언약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런데 이런 은혜를 입고서도 우리는 다시 넘어집니다.
창세기 16:2-3을 같이 보겠습니다. “2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3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 어느 날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자신의 여종 하갈을 아브람에게 첩으로 줍니다. 아마 더 늦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지 자식을 낳아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그 말을 순순히 듣습니다. 어쩌면 아브람도 타협책을 생각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고 했는데 여전히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니 첩을 통해서라도 자손을 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브람의 행동은 여전히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다시 한 번 아브람에게 나타나십니다. 창세기 17:1-5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1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2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3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4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5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하나님은 아브람과 맺은 언약을 다시 상기시키면서 이번에는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아브라함이란 말은 “많은 무리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지금 본처의 아들 한 명도 없이 99세가 된 사람에게 하나님은 다시 한 번 많은 무리의 아버지가 되게 하겠다는 약속을 상기시킵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해 아브라함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창세기 17:17을 같이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하나님은 그 동안 아브라함에게 수없이 많은 약속과, 그 약속을 이행하겠다는 싸인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여전히 믿지 못합니다. 사실 아브라함의 이런 태도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아마 저와 여러분이라고 해도 믿지 못할 것입니다. 인간의 상식으로 믿어지지가 않는데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아브라함도 지극히 상식적인 모습을 보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만약 그 상태에 머문다면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창세기 17:19을 같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여전히 약속을 믿지 못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아주 분명하게 사라가 낳을 아들, 이삭과 언약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기 집의 모든 남자들에게 할례를 행합니다. 창세기 17:23-27을 같이 보겠습니다. “23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 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태어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포피를 베었으니 24아브라함이 그의 포피를 벤 때는 구십구 세였고 25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의 포피를 벤 때는 십삼 세였더라 26그 날에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고 27그 집의 모든 남자 곧 집에서 태어난 자와 돈으로 이방 사람에게서 사온 자가 다 그와 함께 할례를 받았더라.”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믿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이성으로는 믿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성경은 그것을 아브라함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성경이 아브라함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믿음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단순히 굳은 의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굳세게 믿는 것을 가리키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아브라함도 그렇게 굳센 믿음을 갖지는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주도하에 형성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계속 아브라함을 찾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넘어지면 하나님은 다시 찾아가셨습니다. 그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아브라함의 마음에 조금씩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비록 하나님의 약속이 완전히 믿어지지 않을지라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한 걸음씩 따라가며 순종합니다. 성경은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이 성장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조금씩 더 신뢰해 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때로 하나님의 말씀이 잘 믿어지지 않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믿기 어려운 순간도 있을 것입니다. 현실이 너무 힘들어서 낙심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순간에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버리지 않고 다시 찾아오실 것입니다. 그렇게 다시 찾아오신 하나님께 반응하십시오. 여전히 나를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여러분의 마음을 열고 반응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굳센 의지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언약을 지키시려고 나를 포기하지 않고 다시 찾아오시는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마음을 열고 반응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넘어졌다고 해서 너무 자책하지 말고 다시 일어서시기 바랍니다. 끝까지 나를 포기하지 않고 찾아와 다시 일으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 다시 믿음으로 일어서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