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이세라 | ||
조회수 | 1043 | ||
작성일 | 2016-03-06 15:29:31 |
무신론자 에서와 미성숙한 야곱 |
무신론자 에서와 미성숙한 야곱(창세기 25:27-34)
연초에 예고한 것처럼 올해 일 년 동안은 주로 신구약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설교합니다. 이번 달에는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을 살펴볼 계획입니다. 다만 이번 달에는 종려주일과 부활절이 있기 때문에 그런 절기에는 해당 절기에 맞는 설교를 할 계획입니다. 오늘은 야곱이 팥죽으로 형 에서의 장자권을 산, 소위 ‘야곱의 팥죽 사건’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로 태어났습니다. 둘 중에 에서가 먼저 태어나서 형이 되었습니다. 동생 야곱은 장남으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억울했는지 형의 발꿈치를 붙잡고 태어났습니다. 에서와 야곱은 성장하면서 완전히 다른 성향을 가진 아이들로 자라갔습니다. 에서는 매우 들에 나가 짐승 잡는 것을 좋아하는 사냥꾼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조용히 장막에 거주하기를 좋아하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한편 이 가정에는 불화의 씨앗이 잉태되고 있었습니다. 그 불화의 씨앗은 바로 부모의 편애였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에서를 좋아했고,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좋아했습니다. 이삭이 에서를 좋아한 이유는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삭이 에서를 좋아한 이유는 명확하게 나오지만 리브가가 야곱을 좋아한 이유는 명확하게 언급되지 않습니다. 아마 에서가 들판으로 돌아다니는 것과 달리 야곱은 주로 자신과 함께 있었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물론 리브가가 야곱을 좋아한 이유가 그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리브가는 에서와 야곱을 임신했을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본문 23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어쩌면 리브가는 이 말씀을 생각해서 야곱을 더 좋아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도 야곱을 더 좋아하는 리브가의 태도도 역시 잘못된 편애에 불과합니다.
어느 날 에서가 들에서 돌아왔는데 마침 야곱이 죽을 쑤고 있었습니다. 아마 에서는 그 날도 사냥을 하고 돌아와서 대단히 피곤한 상태였습니다. 어쩌면 그 날은 한 마리도 못 잡고 허탕을 쳤을지도 모릅니다. 사냥에 성공했다면 덜 피곤했을텐데 한 마리도 못 잡자 더욱 피곤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동생 야곱이 팥죽을 쑤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 상황이 우연히 팥죽을 쑤고 있었는지 아니면 배고픈 형을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계획한 것인지는 야곱만 알 것입니다. 아무튼 에서는 매우 시장한 상태였고 야곱은 마침 팥죽을 쑤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팥죽은 그 자체로 한 끼 식사가 될 수 있는 우리나라식 팥죽은 아닙니다. 빵과 함께 음료수 대신 먹는 묽은 수프 같은 것이었습니다.
에서는 야곱에게 그 붉은 것을 먹자고 합니다. 원문을 풀어서 해석한다면 “나로 그 붉은 것을 한 입에 꿀꺽 삼키게 하라.” 원문에서는 붉은 것이란 단어를 두 번 반복합니다. 이런 표현은 에서의 충동적인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그 붉은 것, 붉은 것” 하면서 숨을 헐떡이며 먹을 것을 찾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때부터 에서의 별명은 붉다는 뜻의 에돔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이 말은 에돔족이라는 에서의 후손을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야곱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에서에게 장자의 명분을 자신에게 팔라고 요청합니다. 야곱은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장남으로 태어나지 못한 것에 대해 불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기회만 있으면 장자의 축복을 차지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마침 기회가 오자 얼른 형에게 장자의 명분을 팔라고 요구합니다. 당시 장자는 가문의 대를 계승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또한 유산을 상속받을 때도 다른 아들들의 두 배를 받았습니다.
야곱의 제안에 대해 에서는 황당한 반응을 보입니다. 3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여기서 죽게 되었다는 에서의 말은 사실일까요, 과장일까요? 아마 에서의 말은 과장일 것입니다. 한 나절 굶는다고 해서 죽지는 않습니다. 만약 죽을 정도로 배가 고팠다면 어떻게 그 때까지 밖에서 사냥을 할 수 있을까요? 무엇인가에 빠진 사람들은 배고픈 것도 모릅니다. 한참 낚시에 빠진 사람은 배고픔을 잘 모릅니다. 게임에 빠진 아이들도 그 순간에는 배고픔을 잘 모릅니다. 그러다가 그 일이 끝나면 갑자기 배고픔을 느끼는 것이지요. 지금 에서도 그런 상태였을 것입니다. 아이들이 흔히 쓰는 표현과 유사합니다. “엄마 밥 언제 먹어, 나 배고파 죽겠어”
사실 배고파 죽겠다는 말까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었습니다.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에서는 자신의 배고픔은 과대평가하고, 반대로 장자의 명분은 과소평가했습니다. 에서의 모습은 순간적인 충동에 사로잡힌 인간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그는 미래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장자의 축복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지금 당장의 배고픔만 생각했습니다. 야곱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얼른 에서에게 맹세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에서는 망설임없이 즉각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팔았습니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린 것입니다. 에서가 비록 들에서는 유능한 사냥꾼이었는지 모르지만 장막에서는 야곱의 사냥감에 불과했습니다. 에서는 야곱이 놓은 덫에 보기 좋게 걸려들고 말았습니다.
34절은 에서가 얼마나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는지 잘 보여줍니다. 34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에서가 맹세한 후에 야곱은 약속한대로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었습니다. 그러자 에서는 먹고 마시고 일어나 갔습니다. 이 문장을 원문으로 직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먹었다, 그리고 마셨다, 그리고 일어났다, 그리고 갔다.” 이 구절은 ‘그리고’를 통해 네 개의 동사를 연속적으로 나열함으로써 에서가 단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창세기 저자는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고 평가합니다. 여기서 가볍게 여긴다는 말은 가치 있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에서의 결정적인 문제였습니다. 여기서 가볍게 여겼다는 동사는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면서 여호와를 업신여겼다고 할 때 사용된 동사와 같은 동사입니다. 가볍게 여기다, 혹은 업신여기다, 라고 번역된 이 동사는 당연히 보여야 할 존중을 보이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에서는 장자권에 대해 당연히 보여야 할 존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제 에서와 야곱에 대해 좀 더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설교제목을 무신론자 에서와 미성숙한 야곱이라고 정했습니다.
1. 무신론자에서
먼저 무신론자 에서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제가 에서를 무신론자라고 말한 것은 저의 주관적인 평가가 아닙니다. 히브리서 12:16-17이 에서를 그렇게 평가합니다. 히브리서 12:16-17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그 중에서 16절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번역한다면 이렇게 됩니다.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음행하는 자나 세속적인 자가 없도록 살피라.” 왜 히브리서 기자는 에서를 음행하는 자라고 했을까요? 사실 구약성경에 에서가 음행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굳이 찾는다면 이방 여인 중에서 아내를 구한 것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방 여인 중에서 아내를 구한 것을 음행했다고까지 말하는 것은 약간 어색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음행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킬까요? 여기서 음행은 육체적인 음행이 아니라 영적인 음행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음행은 육체적인 음행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영적인 음행인 우상숭배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아마도 에서를 음행하는 자라고 평가한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우상숭배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에서에 대한 두 가지 평가, 곧 음행하는 자와 망령된 자는 결국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 음행은 우상숭배를 가리키고, 망령된 자란 세속적인 자를 가리킵니다. 에서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지 않고 세상의 즐거움을 주인으로 삼은 자입니다. 하나님 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여 하나님의 축복의 상징인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버리는 자입니다.
에서의 잘못은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한 것입니다. 팥죽과 장자의 명분을 바꾼 것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여기서 팥죽과 장자의 명분은 각각 상징하는 것이 있습니다. 팥죽이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장자의 명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팥죽이 눈앞의 이득이라면 장자의 명분은 먼 미래의 이득입니다. 팥죽이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것이라면 장자의 명분은 영적인 것이고 거룩한 것입니다. 팥죽을 택한 에서는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택한 것이고, 장자의 명분을 택한 야곱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보다 하나님의 축복을 선택한 것입니다. 에서의 문제는 바로 그런 세속적인 것을 사랑한 것입니다. 세속적인 것을 사랑하는 사람은 영적인 것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요한일서 2:15-16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교회 안에 세속주의가 자리를 잡으면 그 교회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사람은 언제나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을 사랑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사랑하고 세상은 세상대로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일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평일에는 세상을 사랑하면서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주 분명하게 말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습니다.
에서를 생각해 보십시오. 에서는 분명히 자신의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과 바꾸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더 이상 장자의 권한을 주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에서는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팥죽을 먹는 대신에 장자의 명분을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이 장자의 축복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장자의 축복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이삭이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내린 후에, 에서는 이삭을 찾아와서 눈물로 하소연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에서에게 축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에서의 행동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에서는 팥죽도 먹고 장자의 축복도 누리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팥죽을 사랑한 순간 장자의 축복은 그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그를 우상을 숭배하는 세속적인 사람, 곧 무신론자라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성경말씀을 정면으로 어기려고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다고 말했는데 세상도 사랑하고 아버지도 사랑하려고 합니다. 성경은 아주 명확하게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합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의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머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에서와 같이 우상숭배하는 세속적인 자가 없도록 살피라고 강하게 경고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날마다 여러분 자신을 살피십시오. 우리는 매일 세상 속에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을 사랑하는 세상에 속한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말은 쉽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쉽지 않기 때문에 살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의 경고처럼 날마다 자기를 살피십시오. 세상을 사랑하는 세속주의자가 되지 않도록 자기를 늘 살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미성숙한 야곱
이제 야곱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제가 설교제목에서 야곱을 미성숙한 야곱이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분명히 무신론자인 에서와는 다른 면이 있습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면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동사들을 주목해 보면 에서와 야곱이 얼마나 다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에서를 묘사하는 동사들을 찾아보겠습니다.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 심히 피곤하여,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먹게 하라, 내가 죽게 되었다,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팔았다,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다,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 에서의 행동을 묘사하는 동사들을 볼 때 어떤 느낌이 듭니까? 에서는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먹는 것에 마음을 빼앗긴 상태입니다. 그는 결국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장자의 명분을 팔아 버린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도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먹고 마시고 일어나 갔습니다.
이제 야곱의 행동을 묘사하는 동사들을 찾아보겠습니다. 29절에 보면 야곱이 죽을 쑤었다고 했습니다. 31절에서 야곱은 또한 형에게 장자의 명분을 팔라고 했습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팔겠다고 하자 야곱은 맹세하라고 요구했습니다(33절). 그렇게 에서가 맹세한 후에 비로소 야곱은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었습니다(34절). 야곱의 행동을 묘사한 동사들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듭니까? 에서가 즉흥적이고 충동적이라면 야곱은 계획적이고 침착합니다. 에서가 팥죽 한 그릇을 위해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렸다면 야곱은 반대로 장자의 명분을 얻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렇다면 야곱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야곱도 문제가 많은 사람입니다. 야곱은 형이 가진 장자의 명분을 빼앗기 위해 팥죽으로 협상을 했습니다. 물론 이 사건에서 야곱이 형에게 사기를 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행동을 보면 인간적으로 그리 좋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장자의 명분에 집착한 야곱은 갈수록 더욱 무리수를 두게 됩니다. 나중에 야곱은 결국 아버지를 속이게 됩니다. 털이 많은 형으로 위장하기 위해 염소가죽을 손에 붙이고 눈이 어두운 아버지 이삭을 속입니다. 심지어 네가 정말 에서냐고 물었을 때 야곱은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예, 제가 바로 에서입니다.” 결국 나중에 야곱은 많은 고초를 겪습니다. 성경은 야곱에 대해서도 무조건 긍정적인 시선을 보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에서의 문제가 불신앙이라면 야곱의 문제는 단지 미숙함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갖기 위해 미성숙한 행동을 했다면 에서는 장자의 명분이 갖는 가치가 아예 그의 머릿속에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에서의 이런 행동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고두고 교훈이 되었습니다. 에서는 육체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영적인 공급을 희생했습니다. 일시적인 쾌락을 위해 영원한 것을 포기했습니다. 이것은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신약적으로 해석한다면 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세속적 인간이라면 야곱은 비록 아직 미성숙한 상태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크게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축복에 무관심한 사람은 충동적 쾌락을 추구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주석가 카일 델리취는 에서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에서가 이런 특권들을 상실하게 된 것은 로마서 9장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다. 그러나 바로 그와 동시에, 이 내러티브가 보여주는 것처럼 에서의 자발적인 자기 격하의 결과다.” 로마서 9:13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에서가 축복권을 상실한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에서도 역시 축복권을 상실할만한 행동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의 결과이지만 동시에 스스로 그 길을 선택했습니다. 카일 델리취는 또한 야곱에 대해서는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그는 형제답지 않은 술책을 사용했다.” 야곱은 영적인 야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야망에는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앨런 로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적인 소유를 얻기 위해 간절히 바라는 사람은 비열한 수단으로 그것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속에 살지라도 세상을 사랑하지는 마십시오. 세상을 사랑하는 자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자는 무신론자에 불과합니다. 교회에 다닌다는 것이 여러분이 참된 신자임을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얼마든지 무신론자로 살 수 있습니다. 에서는 요즘으로 말하면 믿는 부모에게서 태어나 기독교적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무신론자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에서를 인용하면서 자기를 살피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우상을 숭배하지는 않는지, 세속적인 가치에 함몰되어 하나님을 잊어버리지는 않는지 여러분 자신을 살피시기 바랍니다. 야곱과 같이 하나님의 축복을, 하나님의 나라를 간절히 사모하십시오. 다만 야곱처럼 인간적인 술수를 부려 장자권을 얻으려는 미성숙한 상태에 머물지 말고 이제 성숙을 향해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이 추구할 것은 성공이 아니라 성숙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사는 동안 날마다 주님의 나라를 이루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또한 장차 영광 가운데 임할 그 나라를 간절히 사모하십시오. 주님의 나라를 사모하며 그 나라에 어울리는 사람으로 날마다 성숙을 향해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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