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박경진 | ||
조회수 | 600 | ||
작성일 | 2016-03-23 16:56:20 |
사명 |
사명(요한복음 19:29-30)
오늘은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종려주일입니다. 그래서 이번 달에 계속 설교하던 야곱에 대한 설교를 잠시 멈추고 예수님의 가상칠언 가운데 한 말씀을 정해 설교하려고 합니다. 이번 주 주일학교 설교는 각 부서별로 자유롭게 정해서 하기로 했습니다. 자녀를 두신 분들은 참고로 알아두시면 되겠습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인데요.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수많은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환영했던 것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종려주일이 지나면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우리 교회는 지난주부터 특별새벽기도회를 시작했습니다. 고난주간인 이번 주간에도 계속 특별새벽기도회를 진행합니다. 고난 주간 동안 주님께서 고난당하신 발자취를 따라가며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우리 주님을 더욱 깊이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예수님은 분명한 삶의 목표를 가지고 짧은 인생을 사셨습니다. 분명한 삶의 목표를 가지고 사셨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 나온 것처럼 마지막 순간에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뚜렷한 삶의 목표가 없었다면 어떻게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은 “다 이루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사명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말로는 “다 이루었다”가 두 단어이지만, 헬라어로는 “테텔레스타이”라는 한 단어입니다. 헬라어에서 이 단어는 본래 어떤 사역을 수행하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종교적인 상황에서 사용되면, 이 단어는 종교적인 의무를 다 감당한 것을 가리킵니다.
십자가에서 극심한 고통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또렷한 의식을 유지하셨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따르면 당시 어떤 사람이 쓸개 탄 포도주를 드렸지만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그것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당시 쓸개 탄 포도주는 일종의 진통제였습니다. 그런 진통제를 마시면 고통은 줄어들지만 동시에 정신도 희미해집니다. 그 진통제 격의 포도주를 거부하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마지막 순간까지 극심한 고통을 참고 견디면서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를 원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분명히 또렷한 의식을 갖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테텔레스타이’라고 외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 이루었다”고 할 때, 도대체 주님께서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뜻입니까? 예수님은 과연 무엇을 다 이루셨을까요?
첫째로, 여기서 다 이루었다는 말은 메시아가 오셔서 이루겠다고 하신 구약의 예언을 다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성경은 구약성경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일생 전체에 걸쳐서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에 관심을 두셨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성경을 응하게 한다.’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성경이란 단어는 마태복음에 세 번, 마가복음에 세 번, 누가복음에 네 번 나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무려 열 세 번이나 등장합니다. 그 중에 두 구절만 찾아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9:24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이 말씀은 시편 22:18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사도 요한은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찢지 않고 제비뽑는 것을 보고 그것도 역시 구약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9:36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당시 군병들은 십자가에 달린 죄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다리를 꺾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죽으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굳이 다리를 꺾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것도 역시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는 시편 34:20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극심한 십자가의 고통 중에도 성경을 이루는 것에 집중하셨습니다.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는 것에 온 힘을 기울이셨습니다. 그래서 극도의 고통으로 탈진할 지경에서도 성경의 예언이 성취된 것을 기뻐하시면서 다 이루었다, 라고 외치셨습니다.
둘째로, 여기서 다 이루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다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7:4을 같이 읽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여기서 이루었다는 동사는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을 때 사용했던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하라고 주신 일을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그 일은 어떤 일입니까?
요한복음 17:1-4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아버지께서 하라고 주신 일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1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2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4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한복음 17:1-4)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맡기신 일은 아버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신 모든 자들에게 영생을 주는 일입니다. 3절에는 영생이 무엇인가가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안다’는 동사는 인격체 상호간에 깊은 교제관계를 이루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이 단어를 사용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맡기신 일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는 참된 앎, 곧 영생을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 택하신 자들에게 하나님을 계시하셨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이 말씀은 잘 이해가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은 택하신 자들에게 하나님을 온전히 계시하여 영생을 주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충분히 하나님을 계시하셨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생각할 것도 없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충분히 계시하셨다면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들은 한결같이 다 도망갈 수 있습니까? 정말 하나님을 온전히 계시하셨다면 최소한 제자들만이라도 스승이 가는 마지막 길을 지켜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자기 제자들마저도 바르게 가르치지 못한 상황에서 과연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다 이루었다’는 말의 의미를 바르게 알려면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바르게 깨달아야 합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맡기신 일은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영생은 예수님께서 자기 목숨을 대속의 제물로 드림으로써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완성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일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인류 구원의 사명을 다 이루셨습니다.
셋째로, 여기서 다 이루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영혼들을 끝까지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3:1을 같이 읽겠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의 삶을 마치고 아버지께 돌아갈 때가 가까웠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때 이미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그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여기서 ‘끝까지’라는 단어는 원어에서 보면 “다 이루었다”는 단어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시간적인 면에서 끝까지 사랑했다는 말도 되지만, 동시에 질적인 면에서 온전히 사랑했다는 말도 됩니다. 이런 면에서 어느 목사님께서 “다 이루었다”를 “다 품었다”로 해석한 것은 깊은 통찰력이 있는 해석입니다. 어떤 면에서 사랑은 품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 주님은 온전히 사람들을 품으셨습니다. 자신을 배반하는 유다도 온전히 품으셨습니다. 자신을 희롱하는 자들을 향하여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자신의 옆에서 은혜를 청하는 강도에게는 오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자신이 죽어가는 순간에도 사랑하는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온전히 품으셨습니다. 극심한 고통으로 실신할 지경에 이른 마지막 순간에도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향한 극진한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은 사랑을 다 이루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온전히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다 사랑하셨습니다. 다 품으셨습니다. 그래서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죽는 장면은 장엄한 승리의 장면입니다. 그 분의 외침도 또한 승리의 외침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마지막 죽는 순간에 다 이루었다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만이 다 이루었다고 외치셨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어렸을 때,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윤리학, 철학, 문학, 정치학, 자연과학, 의학 등의 학문을 배웠습니다. 그는 단 10년 만에 유럽, 북 아프리카, 중동지역, 이 3개 대륙을 정복했습니다. 알렉산더는 점령지의 토양과 기후를 연구하여 그 지역에 적합한 특용작물을 개발하도록 했고, 지역마다 토착화된 문명을 발전시켜서 점령지로부터 환영받았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33세에 갑작스런 질병으로 요절하였습니다. 아라비아의 어느 지역을 정벌하기 위해 원정을 준비하다가 갑자기 인생을 마감하였던 것입니다. 알렉산더는 자신이 젊은 날에 죽는다는 것이 너무 억울했습니다. 그래서 관에 두 개의 구멍을 뚫으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그 관 밖으로 내어 놓고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게 했습니다. 그 이유는 조문객들이 자신의 손을 보고 결국 떠날 때는 빈손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젠가 우리도 우리 인생의 마지막을 맞을 것입니다. 인생의 시작도 중요하지만 인생의 마무리는 더욱 중요합니다. 인생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순간에 내뱉는 말은 그 사람의 삶 전체를 함축적으로 표현합니다.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큰 나라를 이루었던 알렉산더도 떠날 때는 억울해 하면서 빈손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마지막 순간에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분은 사실 땅 한 평 점령한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팔레스타인 땅을 떠나 외국으로 여행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구약성경의 예언을 다 성취하셨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구속의 사명을 다 완수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을 다 이루셨습니다.
주님께서 다 이루셨기 때문에, 다 성취하셨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죄악의 무거운 짐을 버리고 용서의 은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다 이루셨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죽음의 공포를 이기고 영생의 소망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다 이루셨기 때문에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가 그 분의 사랑으로 거듭났습니다. 주님께서 사명을 따라 사셨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놀라운 구원의 은총, 곧 새 삶의 은총을 입고 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인생이 가장 복된 인생입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아름답게 사는 것입니까? 저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따라 사는 인생이 가장 복된 인생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다양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사명의 내용과 무게는 다를지라도 우리 각 사람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붙잡고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복된 인생입니다.
본회퍼와 헬무트 틸리케는 비슷한 시기에 독일 땅에 살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붙잡고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에게 주신 사명의 내용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본회퍼는 2차 대전 기간 동안 히틀러를 지도자로 선택하고 추종한 독일 국민들을 향하여 경고의 메시지를 외치는 것을 사명으로 알았습니다. 그는 그 사명에 충실하게 살다가 처형당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순교한 신학자라고 부릅니다. 반면 헬무트 틸리케는 전쟁 후 완전히 절망에 빠진 독일 국민들에게 새로운 소망을 불어넣어서 회복시키는 사명을 맡았습니다. 틸리케도 전쟁 중에 저항했습니다. 그러나 본회퍼와는 달리 그는 전쟁 후까지 생존했습니다. 한 사람은 처형당했고, 한 사람은 살아남았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본회퍼는 데려가시고 헬무트 틸리케는 살려두셨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분명히 아는 것이 있습니다. 비록 사명의 길이 달라서 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분명한 것은 둘 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따라 사는 삶, 저는 그런 인생이 가장 아름답고 복된 인생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사명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인생 전체를 걸고 뛰어들만한 사명은 과연 무엇입니까? 그 사명을 위해 여러분은 지금 온 힘을 다해 경주하고 있습니까? 그 사명을 이루는데 장애가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버리고, 오직 그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제외하고, 제가 이 땅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사도 바울입니다. 제가 사도 바울을 존경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가 사명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일생동안 단 한 번도 한 눈 판 적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붙잡고 그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4:7-8에서 그의 인생을 마무리하는 순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7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디모데후서 4:7-8)
사도 바울은 과거에 주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던 자입니다. 그러다가 전적인 은혜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박해하던 자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박해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자기 인생을 마치는 순간에 자신이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다 감당했다는 말입니다. 아무 후회도 없이, 아무런 아쉬움도 없이 사명을 온전히 감당했다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멋진 인생입니까? 그는 보통의 세상 사람들처럼 후세에 유산을 남기지도 못했습니다. 높은 자리에 오른 적도 없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옥에 갇히고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습니다.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했습니다. 수고하고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르며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당하게 말합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사도행전 20:2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세종새누리교회 파송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세종에 교회를 개척합니까? 사실 우리 교회도 그다지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교회를 개척할만큼 교인수가 많은 것도 아니고 재정이 넉넉한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새로운 교회를 개척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사명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종에 교회를 세우는 이유는 세종시의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보다 효과적으로 다가가기 위해서입니다. 이 일에 자원하신 분들은 한결같이 이것이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헌신하셨습니다. 사명이 아니라면 왜 굳이 정든 교회를 떠나 새 교회를 세우는 일에 헌신하셨겠습니까? 제가 알기로 세종새누리교회에 헌신하신 분들은 모두 사명을 따라 그렇게 한 것입니다. 또한 이 일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며 정성껏 헌금하신 성도님들도 모두 동일한 사명을 위해 헌신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사명을 붙잡고 사십시오. 다같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주께서 주신 사명은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를 것입니다. 사명의 길을 걷는 모습도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인생을 마치는 날, 감히 주님처럼 다 이루었다고 외치지는 못해도, 최소한 주신 사명을 위해 최선을 다해 충성했노라고 고백할 수 있는 그런 멋진 인생, 복된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사명에 충실한 인생을 살아서 우리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