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박경진 | ||
조회수 | 821 | ||
작성일 | 2016-06-05 12:40:54 |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라 |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라(창세기 37:1-11)
6월 한 달 동안은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에 대해 설교하도록 하겠습니다. 요셉은 워낙 유명한 인물이라서 아마 요셉이 누구인지를 전혀 모르는 분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요셉은 어린 시절에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서 온갖 고초를 겪은 후 애굽의 총리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워낙 인생 스토리가 드라마틱하여 예전에는 성극의 단골 소재로 쓰이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을 보면서 크리스천 부모들은 자기 아이가 요셉과 같이 훌륭한 인물이 되기를 기도하기도 합니다. 요셉에 대한 이런 반응은 요셉을 영웅으로 설정하고 그를 본받자는 방식의 해석에 따른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해석이 바른 것일까요? 물론 성경은 기본적으로 믿음의 영웅들을 많이 다룹니다. 그들에게는 본받아야 할 훌륭한 면이 많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위인을 본받는 것을 너무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보면서 단순히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영웅들을 본받자고 말하는 것은 성경의 본래 목적과 맞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본문을 해석하든지 성경을 해석할 때는 가장 먼저 그 책의 기록 목적이나 핵심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숲은 보지 않은 채 일부 나무만 보고 잘 못 판단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의 핵심적인 주제는 창조, 주권, 언약 등입니다. 창세기에는 하나님의 창조와 재창조가 중요한 주제로 등장합니다. 또한 창세기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강조됩니다. 또 한 가지 창세기의 중요한 주제는 바로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오늘 본문도 이 세 가지 주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하여 야곱의 가문을 새롭게 재창조합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인생을 당신의 주권에 따라 인도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 따라 요셉의 인생에 직접 개입하여 당신의 언약을 이루어가십니다. 오늘 저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적 주권을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가?’라는 관점으로 요셉 이야기를 풀어가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요셉이 어린 시절에 꿈을 꾸었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꿈은 하나님의 계시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요셉은 지금 꿈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꿈은 말이 없이 상징으로만 주어집니다. 요셉의 꿈 이전에 아비멜렉의 꿈이나 야곱의 꿈에서는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그 때는 해석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요셉의 꿈은 말이 아닌 상징으로만 나타납니다. 이제는 꿈 자체 못지않게 해석이 중요한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이제 꿈을 꾼 자는 그 꿈을 바르게 해석해야 합니다. 이 때부터 해석의 훈련을 받은 요셉은 나중에 바로의 꿈을 해석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두 가지 꿈을 상징으로 보여주시고 요셉으로 하여금 해석하게 하신 것은 이제 하나님께서 요셉의 인생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신다는 뜻입니다.
요셉은 두 번에 걸쳐 꿈을 꾸었습니다. 첫 번째 꿈은 요셉과 형들이 함께 곡식 단을 묶는데 요셉의 단은 일어서고 형들의 단은 요셉에게 절하는 꿈이었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이 꿈은 좀 이상합니다. 요셉의 형들은 농부가 아니고 목자였습니다. 직업이 목자인 것을 고려한다면 양을 치는 상징으로 꿈을 꾸게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요셉과 그의 형들이 곡식 단을 묶는 모습으로 요셉의 꿈에 나타났을까요? 이 꿈은 장차 애굽에서 벌어질 일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요셉이 바로의 꿈을 해몽할 때도 바로의 두 번째 꿈은 마르고 가는 일곱 이삭이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킨 것이었습니다. 또한 훗날 요셉의 형들은 곡식을 얻기 위해 애굽에 내려가 총리가 된 동생에게 엎드려 절합니다. 하나님은 요셉이 꾸었던 첫 번째 꿈을 통해 앞으로 애굽에서 벌어질 일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암시하신 것입니다(Mathews, Genesis, NAC). 요셉이 그 꿈의 내용을 형들에게 말하자 형들은 그 일로 인하여 요셉을 더욱 미워하게 됩니다. 형들은 요셉에게 “네가 우리의 왕이 되어 우리를 다스린다는 말이냐”라고 하며 요셉을 미워하였습니다. 요셉은 그 꿈을 앞날에 대한 예언적 계시로 생각했지만 형들은 철없는 동생의 버르장머리 없는 말로 생각했습니다.
그 후 요셉은 두 번째 꿈을 꾸었습니다. 두 번째 꿈은 해와 달과 열 한 개의 별들이 요셉에게 절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해와 달은 요셉의 부모를 가리키고 열한 별은 요셉의 형제들을 가리킵니다. 야곱의 자식들이 별로 비유된 이유는 아마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겠다고 예언하신 것에서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요셉의 두 번째 꿈에서 달이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관해 논란이 있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여기서 달은 요셉의 친어머니 라헬을 가리킬 것 같습니다. 그런데 라헬은 이 때 이미 죽은 뒤이므로 요셉에게 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달은 라헬이 죽은 후 요셉을 돌보아 주었던 양어머니 빌하를 가리킨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상징을 일대일로 대응시켜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본문의 의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야곱도 실제로 요셉에게 절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이 꿈은 하나님께서 장차 요셉을 야곱의 가족들 가운데 으뜸으로 높이신다는 정도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운명론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런 해석은 자칫하면 인간을 프로그램된 로봇 정도로 전락시킬 수 있습니다. 성경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요셉을 높이시고, 그를 통하여 야곱의 가족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주권을 소개하는 것이 이 본문의 목적입니다. 요셉이 두 번째 꿈을 말했을 때 이번에는 아버지까지 나서서 요셉을 책망하였습니다. “나와 네 어머니와 형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그 일로 형들은 요셉을 시기하였고, 아버지는 요셉의 말을 마음에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요셉과 관련된 꿈은 항상 두 개씩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요셉은 두 개의 꿈을 꾸었습니다. 감옥에서 요셉은 두 사람의 꿈을 해몽해 주었습니다. 요셉이 해몽해준 바로의 꿈도 두 개였습니다. 왜 항상 두 개씩일까요? 나중에 요셉은 자신의 입으로 바로가 두 개의 꿈을 꾼 이유를 설명합니다. “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하나님이 속히 행하시리니(창 41:32)” 왜 하나님은 두 개의 꿈을 함께 보여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꿈은 반드시 시행한다는 표시로 두 개의 꿈을 꾸게 하신 것입니다.
요셉의 두 번째 꿈 이야기를 듣고 야곱은 요셉을 크게 꾸짖습니다. 그러나 본문 11절을 보면 야곱은 요셉의 꿈 이야기를 마음에 간직해 두었다고 했습니다. 왜 야곱은 요셉의 말을 마음에 간직했을까요? 그 이유는 야곱 자신도 꿈을 통해 계시를 받은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야곱에게 보여주신 것들을 그대로 다 이루셨습니다. 그런 경험을 통해 야곱은 하나님의 섭리는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자신은 차남이었지만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결국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축복의 대를 계승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경험했기에 야곱은 어린 아들 요셉의 말을 마음에 간직한 것입니다. 반면에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시기하였습니다. 그들은 요셉의 꿈을 무시했습니다. 나중에 형들은 요셉의 꿈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그를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이런 행동은 하나님의 섭리를 인간의 의지로 바꾸어보겠다는 잘못된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요셉의 꿈 이야기를 다루는 오늘 본문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두 가지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요셉은 과연 어렸을 때부터 매우 비범한 인물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 읽었던 위인전을 보면 역사 속의 위인들은 대체로 어릴 때부터 매우 비범한 인물들로 묘사됩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어떨까요? 오늘 본문에는 요셉의 어린 시절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 2절을 보면 요셉은 이 때 십칠 세 청소년이었습니다. 요셉은 배 다른 형들과 함께 양 치는 일을 하다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일러 바쳤습니다.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한 것이 큰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런 모습을 보면 요셉은 지극히 평범한 청소년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한 요셉은 아버지 야곱에게 편애를 받았습니다. 야곱은 요셉에게만 채색 옷을 지어 입혔습니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칠 때 요셉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에게 갔습니다. 그 때도 요셉은 채색 옷을 입고 갔습니다. 형들은 들에서 일하는데 요셉은 채색 옷을 입고 아버지의 심부름을 온 것입니다. 이런 면을 보면 요셉은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는 평범한 청소년이었던 것 같습니다. 형들을 배려하는 속 깊은 면이 있다든가 하는 그런 면은 보이지 않습니다. 꿈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형들의 입장을 조금만 헤아렸다면 아마 굳이 형들에게 그런 꿈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특히 두 번째 꿈 이야기는 더욱 그렇습니다. 첫 번째 꿈 이야기를 듣고 형들이 화를 냈다면 두 번째 꿈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철없이 두 번째 꿈마저 말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면을 본다면 요셉은 철모르는 어린 소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런 면을 보고 요셉을 너무 나쁘게 보는 것도 적절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요셉이 어린 시절부터 매우 비범했던 그런 위인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두 번째 질문은 “요셉이 스스로 꿈을 꾸었는가?”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요셉의 꿈 이야기를 예로 들면서 청소년들에게 큰 꿈을 꾸라고 권합니다. 그렇지만 요셉은 스스로 꿈을 꾼 것이 아닙니다. 요셉이 꿈을 꾼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꾸게 해 주신 것입니다. 청소년들이 큰 꿈을 가지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매우 귀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라는 식으로 이 본문을 해석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바른 해석이 아닙니다. 요셉은 그냥 어느 날 꿈을 꾸었습니다. 요셉이 꾼 꿈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성취하겠다고 자기를 계시하신 것이지 요셉 스스로 비전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내 의지로 비전을 품고, 그 비전을 이루어달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적인 방식이 아닙니다. 성경적인 방식은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에 사로잡혀 일생 동안 하나님의 이끄심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질문을 통해 요셉을 무조건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위인으로 보는 것은 성경에 대한 바른 시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요셉의 생애를 바라보아야 할까요? 우리가 요셉의 생애에서 보아야 하는 것은 그 조상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요셉 이야기는 언약적 주권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과 언약을 이루지 못하게 막는 장애물 역할을 하는 인물들간의 갈등 구조 가운데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요셉의 생애에는 이런 장애물 역할을 하는 인물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요셉의 형들이 장애물 역할을 합니다. 나중에 요셉이 보디발의 종이 되었을 때는 보디발의 아내가 장애물 역할을 합니다. 감옥에 갇혔을 때는 술 맡은 관원장이 장애물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든 장애물을 오히려 도구로 사용하여 당신의 언약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것이 요셉 이야기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가는 데 가장 결정적인 장애물 역할을 하는 사람은 요셉의 형들입니다.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편애하는 것을 보고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미워합니다. 본문 4절을 보겠습니다.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새번역은 여기서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다는 말을 “말 한 마디도 다정스럽게 하는 법이 없었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이복동생이면서 아버지의 편애를 받고, 자신들의 잘못을 고자질하니 자기 동생이 눈엣가시 같았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요셉이 자신의 첫 번째 꿈을 형들에게 말했습니다. “꿈에 우리가 곡식 단을 묶는데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그 꿈 이야기를 말했을 때 형들은 벌컥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우리를 다스리겠느냐?” 그렇게 말하며 요셉을 더욱 미워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다시 두 번째 꿈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또 꿈을 꾸었는데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이번에는 아버지 야곱까지 요셉을 책망하였습니다.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아버지는 책망하고 형들은 요셉을 시기합니다.
나중에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죽이려고 모의합니다. 르우벤의 중재로 죽이지는 않았지만 형들은 결국 요셉을 미디안 상인에게 팔아넘깁니다. 왜 요셉의 형들이 이런 범죄를 저질렀을까요? 창세기 37:18-20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18.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19.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20.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요셉의 형들은 요셉의 꿈 이야기를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힘으로 요셉의 꿈을 꺾으려고 했습니다.
동생을 미워할 수 있습니다. 시기할 수도 있습니다. 혼자만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니 미운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자기가 형제들 가운데 제일 높은 자가 되는 꿈을 꾸었다고 하니 질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동생의 꿈을 자신들의 힘으로 꺾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당시 꿈은 단순히 그 사람의 희망사항이 아닙니다. 그 당시 꿈은 하나님의 계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권을 꿈을 통해 알리신 것입니다. 그런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 요셉을 죽여서 그의 꿈을 꺾어 보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적 주권에 대한 도전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주권은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은 감히 인간이 침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명백하게 밝힙니다. 이사야 45:9-10을 같이 보겠습니다. “9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이와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또는 네가 만든 것이 그는 손이 없다 말할 수 있겠느냐 10아버지에게는 무엇을 낳았소 하고 묻고 어머니에게는 무엇을 낳으려고 해산의 수고를 하였소 하고 묻는 자는 화 있을진저” 하나님 앞에 서면 인간은 사실 질그릇 조각 같은 자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어찌 그 질그릇을 만드신 하나님께 시비할 수 있겠습니까?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씀은 토기장이 이야기를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말씀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주권을 막을 수 없습니다.
한편 아버지 야곱도 하나님께서 언약적 주권을 이루어 가시는 일에 장애물이 됩니다. 자신의 경험을 통해 변화되었기에 요셉의 형들과는 다르지만 야곱도 아직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희미하게 알 뿐입니다. 우선 야곱은 부모의 편애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자신이 직접 경험했으면서 자신도 편애를 합니다. 그로 인하여 자식들간에 갈등이 생기고 결국 형들이 요셉을 팔아넘기게 됩니다. 야곱이 정말 성숙했다면 이런 갈등을 미리 방지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의 언약의 수종자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합니다. 자식들에게 벌어지는 불행을 막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어떻습니까? 요셉도 역시 미숙한 면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편애 속에서 철부지로 자랐습니다. 눈치 없이 자신이 꾼 꿈을 형들에게 말했습니다. 첫 번째 꿈을 말했을 때 형들이 화를 냈다면 두 번째 꿈을 말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아무 생각없이 두 번째 꿈을 또 말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요셉도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어가는 일에 장애물이 되고 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해석은 지나친 것입니다. 요셉이 미숙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아직 그가 어린아이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을 지나치게 영웅시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요셉도 언약을 방해하는 자라고 평가할 필요는 없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꾸게 하신 그 꿈을 마음에 간직했습니다. 물론 요셉이 의도하여 그 꿈을 꾼 것은 아닙니다. 꿈을 꾸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꿈에 따라 언약적 주권을 이루어 가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요셉은 다만 하나님이 꾸게 하신 그 꿈을 마음에 간직하였습니다. 물론 처음 꿈을 꾸었을 때는 요셉도 아마 하나님의 언약적 주권을 희미하게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의 세월을 겪으면서 요셉은 점점 더 분명하게 하나님의 언약적 주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굳게 붙잡습니다. 나중에 총리가 되어 애굽에서 형들을 만난 요셉이 위대한 고백을 합니다. 창세기 45:7-8을 같이 보겠습니다. “7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어린 시절 꾸었던 꿈을 마음에 간직하고 요셉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결국 요셉은 야곱의 가족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에 귀하게 쓰임받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의 주권대로 역사를 운행하십니다. 우리가 볼 때는 내 인생이 별 볼일 없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향하여 놀라운 섭리를 계획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꿈을 꾸게 하시면 그 꿈을 마음에 간직하십시오. 그리고 그저 한 걸음씩 순종하십시오. 다른 사람을 향한 섭리를 보고 시기하지 마십시오. 내게 허락하신 그 길에서 신실하게 순종하며 충성을 다하십시오. 많은 걸림돌이 있을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의 인생에 걸림돌이 되었던 것처럼 여러분의 인생에도 걸림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걸림돌이 사람일 수도 있고 환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보여주신 꿈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걸림돌도 디딤돌로 바꾸시는 분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의 인생에 걸림돌이 된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하나님은 그들의 행동을 디딤돌로 삼아 요셉을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 때문에 낙심하지 마십시오. 환경 때문에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꾸게 하신 꿈이라면 그 꿈을 소중하게 여기고 한걸음씩 순종하십시오. 그럴 때 당신의 주권대로 이루시는 우리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