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박경진
조회수 2490
작성일 2016-08-17 10:26:08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침례의 의미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침례의 의미(로마서 6:1-5)

 

  오늘은 침례식이 있는 날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공식적으로는 일 년에 한 번 여름에 침례식을 합니다. 물론 침례대상자가 희망할 때는 언제든지 개별적으로 침례식을 거행합니다. 제가 주일낮예배에 침례라는 주제로 설교하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성경본문을 다루다가 침례에 관하여 잠깐 말씀을 전한 적은 많이 있지만 설교 주제 자체를 침례로 한 것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침롁식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침례식은 복음의 핵심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귀한 예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개신교는 침례를 포함한 기독교 예식들을 지나치게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개신교는 로마가톨릭의 형식적인 예전중심에 반기를 들고 말씀으로 돌아가기 위해 개혁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로마가톨릭의 형식적인 예전 중심에서 벗어나 말씀으로 돌아가려고 한 시도는 바람직한 것입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너무 극단적으로 예전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사실 교회의 예식들은 본래 말씀의 의미를 시각적으로 잘 보여주기 위하여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으로 개혁하다 보니 아예 예전 자체를 버린 측면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중에서 침례와 주의 만찬, 두 가지는 개혁교회들이 중요한 예식으로 지켜왔습니다. 우리 교회도 역시 침례와 주의 만찬을 교회의 공식적인 예식으로 지켜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두 가지 예식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친히 명령하신 예식이기 때문입니다. 

 

1. 침례와 세례의 차이

 

  먼저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서 침례와 세례의 차이를 간단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아마 이전에 타교단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신 분들은 일단 침례라는 용어 자체가 익숙하지 않을 것입니다. 침례와 세례는 기본적으로 같은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침례는 물에 잠기는 의식이고, 세례는 물을 뿌리는 의식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초창기에는 주로 물에 잠기는 방식의 침례를 행하다가 의식을 행하기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나중에는 물을 붓거나 뿌리는 방식의 세례를 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현대에도 교단에 따라서 어떤 교단에서는 침례를 행하고, 다른 교단에서는 세례를 행하는 등 다양한 모습으로 공존해 왔습니다. 다만 한국교회는 미국장로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면서 주로 약식침례인 세례를 행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습니다만 초창기 한국교회가 미국장로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면서 심지어 성경을 번역할 때도 본래의 원어적 의미에 부합하는 침례가 아니라 실제로 행하던 관습을 따라 세례라고 번역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결과로 한국교회에서는 침례가 아닌 세례가 더 옳은 방법인 것처럼 인식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전 세계적으로 보면 세례라는 의미보다는 침례라는 의미로 번역된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원어에서도 물에 잠긴다는 뜻의 밥티스마이고 영어도 헬라어 원어를 따라 뱁티즘이라고 합니다. 또한 대부분의 최신번역들이 이런 의미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는 대한성서공회에서도 세례로 번역하고 각주에 침례라고 표시하거나 아니면 아예 침례라고 표기하여 보급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초창기에는 침례 표기 성경을 단체로 구입하여 사용하기도 하였었습니다.

 

  정리하자면 침례와 세례는 본질적으로 같은 의식을 표현하는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다만 침례가 본래적 의미를 갖는 이름이라면 세례는 후대에 약식으로 바뀐 의식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에서는 세례를 행하는 교회가 많다 보니 오히려 세례가 본래적인 이름인 것처럼 인식이 된 것입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대부분의 장로교 신학자들도 모두 인정하는 것입니다. 현재 선교지에서는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교파에 관계없이 침례를 시행합니다. 물론 세례를 행하는 곳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수의 선교사들이 약식의식인 세례보다는 정식의식인 침례를 더 선호합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전통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어렵지만 그런 영향을 덜 받는 선교지에서라도 처음부터 정식으로 가르치는 것이 옳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간혹 타 교단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다시 침례를 받아야 하느냐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반드시 다시 침례를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침례문제에 대해서 침례교회들은 크게 두 가지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페쇄적 회원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교회들은 반드시 물에 잠기는 침례를 받아야만 회원으로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열린 회원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교회들은 참된 신앙고백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면 그 세례도 인정합니다. 우리 교회는 열린 회원제도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다만 교단의 규정에 순종하는 의미에서 교역자와 안수집사에게는 필수적으로 침수침례를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그 분들은 자신이 직접 침례를 집례해야 하는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안수집사가 없기 때문에 현재 목회자와 선교사에게만 반드시 침수침례를 요구합니다. 

 

  우리 교회의 경우 초창기에 목자님들이 모두 침례를 받았었습니다. 그 이유는 야외에서 침례식을 할 때 목자님들이 침례탕에 들어와 저와 함께 집례를 했기 때문입니다. 침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침례를 집례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초기에는 목자님들이 다같이 침례를 받고 저와 함께 침례탕에 들어와 함께 집례했습니다. 그 후 교회 안에 침례탕이 생긴 다음부터는 혼자서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서 목자님들이 함께 침례식을 집례하는 일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목자님들에게 반드시 침례를 받도록 요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정리하면 우리 교회는 타교단에서 세례받은 것도 인정합니다. 다만 장차 침례를 집례해야 할 지도자들에게는 반드시 침수침례를 요구합니다. 

 

2. 침례의 의미 - 침례란 무엇인가?(로마서6:1-5)

 

  침례는 하나의 상징적인 의식입니다. 그렇다면 침례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제가 앞에서 간단하게 말씀드렸던 것처럼 침례의식은 구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물에 잠겼다가 다시 올라오는 침례의식은 그 행위 자체가 우리의 구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원이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정의를 할 수 있겠지만 구원이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옛 사람은 죽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새 사람이 되어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물에 완전히 잠겼다가 나오는 침례의식은 옛 사람의 죽음과 새 사람의 부활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로마서 6:3-4a을 같이 보겠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침례는 두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는 죽음이고, 또 한 가지는 부활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았다’는 말에는 죽음과 부활, 두 가지 의미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침례받을 때 물에 잠기는 것은 우리의 옛 사람이 온전히 죽었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하여 침례를 받았습니다. 물에서 올라오는 것은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죽음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그 자체로 위대한 속죄의 제사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이 부활과 만났기 때문에 그 죽음이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을 이기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도 그 분을 믿고 그 분과 연합할 때 부활한다는 소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침례의 두 번째 의미는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다는 것입니다. 4b-5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의 옛 사람이 죽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죽음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옛 사람의 죽음은 새로운 사람으로 부활하기 위한 것입니다. 침례를 받을 때 물에 잠겼다가 물에서 올라오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하여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의 옛 사람은 죽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납니다. 침례는 그런 우리의 내면의 변화를 교회 공동체 앞에서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침례는 아주 중요한 공적인 신앙고백입니다.

     

3. 침례자의 자격 - 누가 침례를 받을 수 있으며 받아야 하는가? (행 8:37)

 

  사도행전 8:35-38을 같이 읽겠습니다. “35.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36.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침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37절 없음) 38.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침례를 베풀고” 이 말씀에 나타나는 내시는 지금 빌립에게 처음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 복음을 듣고 그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내시가 말합니다. “물이 있으니 지금 당장 침례를 받는 것이 어떠냐? 무슨 문제가 있느냐?”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빌립이 당장에 물로 내려가서 그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침례를 베풉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나 침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니 좀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침례를 받아야 합니다.

 

  어떤 교단에서는 침례나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연령을 제한하기도 합니다. 또한 침례를 받기 전에 학습이라는 과정을 두어서 교회에 출석한지 일정한 기간이 지나야 침례를 행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무분별하게 침례에 참여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구원의 확신도 없는 사람에게 함부로 침례를 남발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사실 어느 정도 실용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성경적인 근거가 있다기보다는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방법입니다. 침례교단에서는 구원의 확신 외에 어떤 자격요건도 만들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침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침례교회에서는 공식적으로 연령의 제한을 두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연령에 따라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중학생이 되어야 비로소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어떤 사람은 초등학생 때도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 개인차가 있기 때문에 우리 교회는 연령을 제한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아이의 고백이 진실한 고백인가를 확인하는 절차를 밟습니다. 초창기에 우리 교회에서는 초등학생에게도 침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아이들이 경쟁적으로 침례를 받으려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 부작용 때문에 지금은 중학생 이상에게만 침례를 베풉니다. 그러나 그것이 법은 아닙니다. 초등학생이라도 진실한 믿음으로 신앙을 고백한다면 침례를 베풀 수도 있습니다.

 

  침례교회는 교회출석기간으로 제한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것이 그런 식으로 오래 믿었다고 해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출석 첫 주에 주님을 영접했다면 바로 침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10년이 지났어도 구원의 확신이 없다면 침례를 받을 수 없습니다. 또한 침례교회에서는 일부 다른 교단에서 행하고 있는 유아세례를 행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유아세례가 비성서적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침례는 믿음을 고백한 사람만 받을 수 있는데 유아는 스스로 믿음을 고백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아세례를 행하지 않습니다. 다만 부모가 믿음으로 자녀를 기르겠다고 고백하는 의미에서 헌아식을 행합니다.

 

  이런 성경적인 배경에 근거하여 우리 교회에서는 침례자의 자격을 크게 두 가지로 제한합니다. 첫째로, 구원의 확신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신앙간증문을 작성하여 제출하고 교역자들과 상담을 해야 합니다. 둘째로, 침례의 의미에 대하여 정확하게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이 두 가지 원칙만 지키면 침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외의 부수적인 절차를 생략한 이유는 성경적인 방식대로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에 없는 것을 우리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보다는 성경적 원리에 충실한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4. 침례의 이유 - 왜 우리는 침례를 받아야 하는가?

 

  어떤 분들은 침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면 왜 우리가 굳이 침례를 받아야 하느냐고 질문하기도 합니다. 침례를 받아야 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우리가 침례를 받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8:19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침례를 베풀라고 하셨다면 우리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침례를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이유를 묻는 것에 익숙해 졌습니다. 만약 사람을 상대한다면 이유를 묻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자되신 그 분께서 하신 말씀에 대하여 이유 없이 순종하는 것도 오늘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침례를 받아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우리의 신앙을 공동체 앞에서 공개적으로 고백하기 위해서입니다. 침례가 구원의 필수조건이 아니기 때문에 침례를 받지 않아도 구원받는데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침례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역사를 보면 처음에는 침례가 개인적으로 시행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침례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적인 행사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고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집에서 자녀가 태어나면 온 집안의 축제이고 경사입니다. 결코 그 아이를 출산하는 엄마 혼자의 일이 아닙니다. 아빠도 기뻐하고 다른 형제들도 기뻐합니다. 심지어 할아버지, 할머니 등 친척들도 모두 기뻐합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침례는 거듭남의 표시입니다. 한 사람이 영적으로 출생하게 된 것을 기뻐하며 축하해주는 것입니다. 혼자서 주님을 영접하고 조용히 지내면 단지 몇 사람만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침례라는 공적인 의식을 통하여 자신의 신앙을 공동체 앞에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침례를 받는 것이 인간적으로 어색하고 부끄럽게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거듭났다면 반드시 침례를 받아야 합니다. 믿음의 가족들 앞에서 거듭남을 고백하여 온 가족에게 함께 축복받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예식입니다.

 

5. 침례의 방식 - 어떻게 침례를 받아야 하는가?

 

  현재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침례의 방식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약간의 물을 그릇에 담아서 침례자의 머리에 뿌리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의 침례는 정확히 말하면 세례라고 합니다. 둘째는 물에 몸을 절반쯤 담그고 머리위로 물을 붓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의 침례를 관수례라고 합니다. 셋째는, 완전히 전신을 물에 잠그는 방식입니다. 이런 식으로 완전히 물에 잠기는 방식을 침수침례라고 합니다. 사도들이 행했던 최초의 침례식은 거의 항상 물에 완전히 잠기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다가 3세기경부터 관수례가 행해지기 시작했는데, 그 후에 이런 방식의 침례가 더욱 널리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침수침례가 아닌 세례나 관수례가 더 널리 통용된 이유는 아무래도 정통 침례보다는 상대적으로 간편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침례교에서는 완전히 물에 잠기는 침수침례를 원칙으로 합니다. 그러나 침례를 받는 사람에게 건강상의 문제가 있거나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을 경우 세례나 관수례를 행하기도 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세례와 관수례를 시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세례는 임종을 앞둔 환자에게 시행했습니다. 관수례는 도저히 많은 물을 구할 수 없는 특수한 상황에서 시행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외에는 항상 몸을 물에 완전히 잠그는 침수침례를 시행했습니다. 침례를 받는 방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저는 침수침례만을 고집하지는 않습니다. 침례의 방식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은 본질이 아닌 형식에 집착한다는 면에서 비성서적인 행동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침수침례가 침례의 의미를 가장 잘 보여주는 방식이기 때문에 저는 가능한 한 침수침례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침례는 구원을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적인 의식입니다. 상징은 그 상징이 보여주고자 하는 본질을 잘 드러내야 합니다. 만약 어떤 의식이 본래 의미를 잘 보여주지 못하면 그 의식은 의미를 상실한 채 하나의 형식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저는 침례교 목사이기 때문에 침수침례를 선호하기도 하지만 침수침례가 우리의 구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의식이기 때문에 침수침례를 선호합니다. 

 

  침례의 방식을 생각하면 제 마음에 떠오르는 두 가지 사건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는 미국에 있을 때 이웃교회에서 있었던 침례식 사건입니다. 그 교회에는 침례탕이 있었습니다. 날씨가 상당히 추울 때이기 때문에 보통 미리 침례탕에 물을 받아서 물을 따뜻하게 데워 놓습니다. 미국침례교회의 침례탕들은 대부분 물을 따뜻하게 하는 장치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진행하는 중에 실수로 침례탕에 있는 물이 모두 하수구로 새어 나가 버렸습니다. 막상 예배를 마치고 침례식을 하려고 보니 침례탕에 물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고민을 하다가 판단을 잘못했습니다. 어차피 물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니 관계없다고 생각하고 물이 하나도 없는 침례탕에 들어가서 침례자를 눕혔다가 일으키는 동작만 행하는 것으로 침례를 베풀었습니다. 

 

  일단 그 날의 침례식은 그렇게 끝났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날 침례받은 분의 마음속에 고민이 생긴 것입니다. “과연 내가 침례를 받은 것인가, 안 받은 것인가? 물이 하나도 없는 곳에서 그냥 누웠다가 일어나기만 했는데 그것이 침례인가, 아닌가?” 얼마나 고민이 되었는지 제 친구 목사에게 상담을 청해왔습니다. 그것도 침례라고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그 날의 침례식은 침례받는 분의 마음에 그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날의 침례식은 바른 의미를 담은 상징적인 의식이 아니라 단순히 형식으로 그쳐버린 것입니다.  

 

  또 다른 침례식은 제가 중국의 지하교회에서 은밀하게 탈북민 자매에게 침례를 베푼 것입니다. 중국 공안의 눈을 피해서 침례식을 해야 했기 때문에 가정용 욕조에서 침례식을 했습니다. 침례식을 하기 전에 현장에 답사를 가서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파트의 욕조라는 것이 사람이 물에 완전히 잠길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관수례로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침수침례가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관수례로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문제를 두고 혼자서 한참 고민하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침례식을 하기 직전에 주님께서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 날 그 자매님을 욕조 속에 앉혀 놓고 몸의 일부분씩 물속에 잠기게 했습니다. 이른 바 부위별 침례식을 시행한 것입니다. 먼저 바닥에 앉게 하고 그 자매에게 말했습니다. “자매님, 자매님의 다리도 죽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다리를 구부린 채 몸통을 잠기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매님의 몸통도 죽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다리를 좀 더 들게 하고 머리를 잠기게 했습니다. 그리고 또 말했습니다. “자매님의 머리, 자매님의 생각도 다 죽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매님, 자매님의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팔을 붙잡고 물에 집어넣으면서, 다리를 붙잡고 물에 집어넣으면서, 몸통을 붙잡고 물에 집어넣으면서 저는 그 분과 그런 식으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제 자매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와 함께 자매님의 모든 것이 다 죽었습니다.” 그리고 물에서 일으키면서 다시 말했습니다. “이제 자매님은 죽었다가 다시 살았습니다. 이제는 새 사람이 되어 사십시오.”

 

  저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의 침례식을 집례했습니다. 그렇지만 제 인생에서 가장 깊이 남아있는 침례식은 바로 아파트의 욕조에서 적은 양의 물로 불편하게 시행했던 그 침례식입니다. 저와 그 자매가 모두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 자매가 침례식에서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 그 후 일 년 동안 몰래 숨어서 일하여 번 돈의 십일조를 우리 교회에 보내왔습니다. 얼마 후에 똑 같은 장소에서 침례식을 할 기회가 또 있었습니다. 그런데 침례 받는 분의 체격이 너무 커서 그 때는 부위별로 해도 도저히 물에 잠글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관수례를 행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침례를 받는 분이나 저나 이전과 같은 감격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 때 그 사건을 통해 제가 깊이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침례를 행하지 않으면 이 의식은 큰 의미가 없는 형식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날 이후로 웬만하면 약식으로 하지 않습니다. 정말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항상 정식으로 완전히 물에 잠기는 침례식을 행합니다. 그래야 그 의미가 마음 깊이 새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침례식이 껍데기만 남은 형식이 아니라 바른 의미를 담은 참된 예식이 되기 때문입니다. 

 

6. 침례의 기능 - 침례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베드로후서 3:21)

 

  1) 침례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표시입니다. 간혹 어떤 분들은 침례교회를 잘못 알고 침례교회에서는 침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침례교를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침례는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침례는 다만 구원받은 표시입니다. 

 

  2) 침례 의식 자체가 죄를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침례는 하나님을 향하여 약속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21을 같이 읽겠습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이 말씀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침례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침례자체가 우리의 죄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침례는 무슨 의미를 갖고 있습니까? 오늘 말씀에서 침례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간구라는 말은 “요구”라는 뜻과 “약속”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는 약속이라는 뜻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침례는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약속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니 옛 사람을 버리고 새로운 사람으로 살겠습니다.” 하고 하나님 앞에서 약속하는 것입니다. 침례 자체에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침례는 믿음의 공동체 앞에서 우리 각자가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고 앞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겠다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오늘 침례를 받는 분들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그렇게 결단하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침례식 자체에 무슨 마술적인 능력이 있어서 갑자기 사람이 성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침례는 이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성화의 삶을 살겠다는 자신의 결단과 다짐을 회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말씀과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사십시오. 그런 순종을 통하여 우리는 점점 더 성화되어 갈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다가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날, 우리는 온전히 거룩한 자로 변화될 것입니다. 침례는 그런 성화의 첫 번째 걸음입니다. 오늘 침례를 받는 분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성도들이 말씀과 기도 가운데 성령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서 날마다 성화되어 가시기를 우리 주님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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