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정준화 | ||
조회수 | 1722 | ||
작성일 | 2017-01-08 14:58:02 |
인간 |
인간(창세기 1:26-27, 2:7)
오늘은 창세기 1-2장을 중심으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인간은 한없이 연약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그 어떤 동물과도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존재입니다. 또한 인간이란 한없이 부패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때로는 대단히 이타적인 삶을 살기도 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에게는 이처럼 양면성이 있습니다. 이런 양면성 때문에 어떤 사람은 성선설을 주장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성악설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성선설이 맞을 수도 있고, 성악설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삶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인간에 대해 바른 관점을 가지려면 성경이 인간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특히 최초의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창세기가 인간을 어떤 존재로 그리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창세기는 인간을 어떤 존재로 그리고 있을까요?
첫째로,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창세기 2:7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이 부분에 언어의 유희가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땅은 아다마이고, 사람은 아담입니다. 아담은 아다마에서 나온 존재입니다. 여기서 아담이란 단어는 인류의 첫 사람인 아담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이기도 하고, 단순히 사람을 가리키는 보통명사이기도 합니다. 이 구절에서는 사람을 가리키는 보통명사로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성경이 보여주는 언어의 유희는 단순히 언어의 유희로 그치지 않습니다. 이런 언어의 유희는 인간이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임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아담은 아다마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풀어 말하면 인간은 땅의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었다는 것을 볼 때 사람은 땅과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 삶은 땅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땅에 발을 딛고 삽니다. 땅에서 자란 식물을 먹고 살아갑니다. 땅이 없으면 사람은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일시적으로는 바다에 배를 띄우고 살 수 있지만 그런 식으로 계속 살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결국 땅에 발을 딛고 살아야 합니다. 또한 사람이 땅의 흙으로 지어졌다는 말은 결국 사람은 땅의 흙에 불과한 비천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지속적으로 인간에 대한 이런 관점을 보여줍니다. 창세기 3:19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인간이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이며 결국 흙으로 돌아갈 운명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구약성경 욥기도 인간에 대한 이런 관점을 보여줍니다. 욥기 4:19을 같이 읽겠습니다. “하물며 흙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 앞에서라도 무너질 자이겠느냐” 욥기는 인간을 흙집에 사는 존재로 묘사합니다. 인간이 흙으로 만들어진 비천한 인생이라는 사실을 표현한 것입니다. 욥기 34:14-15은 또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만일 뜻을 정하시고 그의 영과 목숨을 거두실진대 모든 육체가 다 함께 죽으며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리라” 하나님께서 사람의 호흡을 거두시면 인간은 바로 흙으로 돌아갑니다. 시편 103:14에서 시인도 또한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시인은 인간이 결국 한낱 먼지와 같은 비천한 존재임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창세기와 욥기, 시편 등은 한결같이 인간을 비천한 존재로 표현합니다. 인간은 흙으로 지어졌다가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비천한 존재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권력을 누리던 사람도 결국 흙으로 돌아갑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돈을 가지고 있던 사람도 결국 흙으로 돌아갑니다. 천하의 거의 모든 땅을 정복했던 알렉산더는 불과 33세의 젊은 나이에 땅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영원히 살고 싶었던 중국의 진시황도 결국 땅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결국 다 땅으로, 흙으로 돌아갑니다. 인간은 그와 같이 유한하고 비천한 존재입니다.
구약성경 전도서는 인간의 이런 실체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영화를 다 누려본 전도자는 전도서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자는 모든 것이 헛되다고 고백했습니다. 전도서 2:16-17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자도 우매자와 함께 영원하도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모두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미워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에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로다.” 전도자는 이 땅에서 지혜로운 삶을 사는 자나 우매한 삶을 사는 자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은 다 헛되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대단한 업적을 이룩한 사람이나 이름 없이 평범하게 사는 사람이나 결국 다 흙으로 돌아갑니다. 이 땅에서 큰 부자로 살았던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결국 다 흙으로 돌아갑니다. 이 땅에서 지혜롭게 살았던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결국 다 흙으로 돌아갑니다. 창세기 2:7에서 인간이 흙으로 지음 받았다고 기록한 것은 바로 그런 뜻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결국 비천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대단한 존재처럼 보여도 생명을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서면 인간은 누구도 예외가 없이 유한하고 비천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인간에 대한 성경적 관점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면 하나님 앞에서 교만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결국 흙으로 빚어졌으며 장차 흙으로 돌아갈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인간은 하나님의 호흡으로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직접 지으셨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직접 당신의 손으로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지으셨다는 단어는 주로 토기장이가 흙으로 무엇인가를 만들 때 사용하던 단어입니다. 이사야 29:16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의 패역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 이 말씀에서 짓다, 혹은 빚다, 라는 단어가 창세기 2:7에 나온 지으셨다는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여러분, 토기장이가 도자기를 만들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정성스럽게 흙을 만져가면서 그릇을 다듬어 냅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 그렇게 정성스럽게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손으로 우리를 빚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직접 우리를 지으시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토기장이가 정성스럽게 토기를 만들기는 하지만 토기장이가 만든 토기는 말 그대로 토기일 뿐입니다. 그것은 생명력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것은 그와 다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여기서 생기라는 말은 생명의 호흡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호흡이라는 단어는 24번 등장하지만 생명의 호흡이라는 말은 이 곳 한 군데에만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그러자 인간이 생령이 되었습니다. 생령이라는 말은 살아있는 영혼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원문에는 살아있는 영혼이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그냥 단순히 살아있는 존재라고 되어 있습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이 하나님의 생명의 호흡을 받자 그 때부터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호흡을 받을 때 비로소 살아있는 자가 됩니다. 뒤집어서 생각하면 하나님이 없으면 인간은 한낱 흙에 불과합니다. 이런 면에서 인간은 철저히 하나님께 의존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호흡을 주신 동안에는 살아있는 존재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코에서 호흡을 거두어가시면, 그 숨을 거두어가시면 인간은 그 순간 죽은 존재가 됩니다. 흙덩어리에 불과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잊고 삽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철저히 의존하며 살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고 삽니다. 마치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는 것처럼 큰소리치며 삽니다. 자신이 대단한 능력이 있는 존재인 것처럼 착각하고 삽니다. 하나님께서 그 코에서 호흡을 거두시면 그 순간 흙덩어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을 ‘숨을 거두셨다’고도 표현합니다. 그 숨을 거두시는 주체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숨을 불어넣으셔서 살아있는 존재가 되게 하신 하나님께서 그 숨을 도로 거두어 가시는 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구약성경 욥기와 시편에는 인간의 유한함에 관한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욥기 27:3에서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호흡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 하나님의 숨결이 아직도 내 코에 있느니라.” 욥은 자신이 아직 살아 있는 것을 하나님의 숨결이 아직도 자신의 코에 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그 숨결을 아직 거두어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아직 살아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신 자신의 호흡을 거두어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편 104:29에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불어 넣어주신 호흡을 거두어가시면 우리는 그 날로 죽어 먼지로 돌아갑니다. 창세기 2:7에 따르면 인간은 땅의 흙, 곧 땅의 먼지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그런 땅의 먼지에 하나님께서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어 살아있는 존재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하나님께서 그 호흡을 거두어가시면 그 순간 인간은 다시 땅의 먼지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비천함과 영광을 함께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인간은 영광스러운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떠나면 인간은 비천한 존재로 전락하고 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인간은 살아 있는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성으로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감성으로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의지로 바른 삶을 결단할 수 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인간은 창조주를 바라보고 그 영광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 분 앞에 경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인간이 남긴 여러 예술품들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런 아름다운 작품을 남길 수 있겠습니까? 인류역사에 길이 남는 아름다운 음악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작곡자에게 영감을 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렇게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실을 생각하면 인간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존재입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피조물도 인간처럼 영광스럽지는 않습니다. 인간은 과연 참으로 특별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호흡을 거두시면 인간은 그 순간 땅의 먼지에 불과한 존재로 전락하고 맙니다. 위대한 음악가도 하나님이 호흡을 거두시면 그 순간 땅의 먼지에 불과합니다. 위대한 미술가도 하나님이 호흡을 거두시면 그 순간 땅의 먼지에 불과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지성을 가진 사람도 하나님이 그 호흡을 거두시면 그 순간 땅의 먼지에 불과한 존재가 됩니다. 인간은 그렇게 양면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인간은 위대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대단히 허무하고 비천한 존재입니다. 그 갈림길에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위대한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호흡을 거두어 가시면 땅의 먼지에 불과합니다.
셋째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땅의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당신의 생기를 불어 넣어 살아있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창세기를 살펴보면 하나님은 단지 인간을 살아있는 존재로만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1:26-27을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구약성경에서 ‘형상’이라는 단어는 주로 우상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민수기 33:52을 같이 보겠습니다.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다 몰아내고 그 새긴 석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다 깨뜨리며 산당을 다 헐고” 이 말씀에서 우상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형상이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열왕기하 11:18을 함께 읽겠습니다. “온 백성이 바알의 신당으로 가서 그 신당을 허물고 그 제단들과 우상들을 철저히 깨뜨리고 그 제단 앞에서 바알의 제사장 맛단을 죽이니라 제사장이 관리들을 세워 여호와의 성전을 수직하게 하고” 이 말씀에 나오는 우상도 역시 ‘형상’이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형상이라는 단어는 이 외에도 구약성경의 여러 곳에서 우상이라는 뜻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고대 근동사람들은 형상은 곧 그 존재의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신들을 닮은 우상을 만들어 놓으면 그 우상이 신들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신들의 일을 모두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신들이 그 우상을 통하여 일할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그 우상은 신들의 일을 대신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상숭배가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말씀은 인간이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는 자로 창조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일을 대신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을 닮은 자를 이 땅에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여 하나님의 일을 대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후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을 반역하는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형상은 심하게 훼손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은 큰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반역하고 타락한 인간이 생육하고 번성한다면 이 땅이 갈수록 더 악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타락한 인간을 구속할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골로새서 1:15과 히브리서 1:3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소개합니다. 먼저 골로새서 1:15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이시니” 이제 히브리서 1:3을 같이 보겠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인간이 범죄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자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 당신을 닮은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다시 회복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을 단순히 생물학적인 출산의 의미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자들이 이 땅에 많아지는 것이 진정한 생육과 번성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은 양면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인간은 땅의 흙으로 만들어진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인간은 하나님의 호흡으로 살아있는 존재가 된 존귀한 존재입니다. 또한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깨달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인간은 본래 에덴동산에서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에덴동산이 어떤 곳입니까? 에덴이라는 말은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에덴동산은 기쁨의 동산입니다. 왜 에덴동산이 기쁨의 동산입니까? 에덴동산이 기쁨의 동산인 이유는 그 곳에는 생명의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는 각종 과일나무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생명의 젖줄인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생명의 젖줄인 강물에 뿌리를 내리고 각종 과일나무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모든 생명의 역사를 만드신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에덴동산의 생명의 역사는 하나님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산다는 것은 하나님께 의존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을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따라 관리하며 사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 때 인간은 기쁨의 동산에서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장차 들어갈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가장 아름답고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곳입니다. 그 곳은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인간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 때 가장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도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의존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자에게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아무리 그럴듯한 삶을 살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삶은 결국 생명의 역사가 아닌 사망의 역사를 일으킬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늘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호흡을 거두어가시면 하루아침에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연결되어 살 때만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생명의 능력으로 살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에 있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서 이런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는 것과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순종하는 자는 주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습니까? 왜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나님 안에 거하고, 그런 자만이 생명의 역사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땅의 흙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떠나면 인간은 그 순간 땅의 흙과 같은 존재로 전락합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의존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릴 때 비로소 인간은 아름답고 존귀한 삶, 영광스러운 삶을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그런 삶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삶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이 땅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땅이 되게 하는 삶입니다. 올 한 해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땅의 먼지에 불과한 비천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영광스러운 자로 주님 안에 붙어사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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