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정준화 | ||
조회수 | 1199 | ||
작성일 | 2017-03-29 14:40:26 |
고난, 은혜, 섭리 |
고난, 은혜, 섭리(창세기 45:1-8) 오늘은 요셉에 대해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3월 한 달은 창세기에 나오는 족장들을 한 주에 한 사람씩 살펴보았습니다. 첫 주에는 아브라함에 대해 살펴보았고, 둘째 주에는 이삭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지난주에는 본래 야곱을 다루는 순서인데 외부강사를 모셨기 때문에 다루지 못했습니다. 오늘은 순서에 따라 요셉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최근에 수요예배에서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의 생애를 계속 살펴보았기 때문에 수요예배에 꾸준히 참석하신 분들은 오늘의 요셉 이야기가 매우 익숙할 것입니다. 요셉의 생애는 그가 입었던 옷으로 구분하면 쉽게 정리가 됩니다. 요셉이 입었던 옷을 중심으로 그의 생애를 나누면 크게 네 단계로 구분됩니다. 첫 번째 단계는 요셉이 채색 옷을 입고 살던 시기입니다. 요셉이 채색 옷을 입고 지냈던 시기는 아버지 집에서 사랑받으며 살던 어린 시절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요셉이 노예 옷을 입고 살던 시기입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 팔려 약 10년 동안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 지냈습니다. 세 번째 단계는 죄수 옷을 입고 살던 시기입니다. 요셉은 보디발 아내의 모함으로 누명을 쓰고 약 2년 동안 감옥에 갇혀 지냈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 단계는 요셉이 화려한 총리 옷을 입고 살던 시기입니다. 요셉은 마침내 애굽의 총리가 되어 당시 중동지역과 북아프리카 전역을 기근에서 구원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 중에서 요셉이 총리의 옷을 입고 살던 시기에 있었던 일을 다룹니다. 요셉은 기나긴 고난의 시기를 잘 견뎌내고 마침내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요셉이 총리가 된 후에 요셉의 형들이 곡식을 구하러 이집트에 왔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단번에 알아보았지만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시험하기 위해 형들이 곡식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고 정탐하러 온 것이라고 몰아세웠습니다. 그러자 형들은 자신들은 결코 정탐꾼이 아니라고 총리 요셉에게 하소연합니다. 이에 요셉은 형들에게 당신들의 결백을 입증하려면 막내 동생을 데려오라고 합니다. 그 후 요셉의 형들은 집에 돌아와서 아버지 야곱에게 전후 상황을 설명하지만 야곱은 베냐민을 보내지 않습니다. 야곱의 입장에서는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큰 아들 요셉도 잃었는데 작은 아들 베냐민까지 잃을까 염려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다시 곡식이 떨어지자 아버지 야곱은 어쩔 수 없이 막내 베냐민을 형들과 함께 이집트로 보냅니다. 베냐민을 본 요셉은 그 정을 억제하기 어려웠지만 내색하지 않고 다시 형들을 시험합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곡식을 팔면서 자신이 아끼는 은잔을 베냐민의 자루에 몰래 넣게 합니다. 요셉의 형들이 떠난 후에 요셉은 신하들을 보내 형들을 잡아오게 합니다. 베냐민의 자루에서 요셉이 아끼는 은잔이 발견되자 요셉의 형들은 할 말을 잃어버립니다. 결국 요셉의 형들은 자신들이 모두 요셉의 종이 되겠다고 말하지만 요셉은 그 은잔이 발견된 베냐민만 종으로 삼겠다고 말합니다. 그 때 요셉의 형 가운데 한 명인 유다가 베냐민을 구하기 위해 간절하게 탄원합니다. 유다는 아버지 야곱의 입장에 서서 요셉에게 간절히 탄원합니다. 요셉도 죽었는데 베냐민마저 잃는다면 아버지 야곱은 살 수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절절한 심정으로 총리 요셉에게 아룁니다. 그리고 자신이 베냐민 대신 종이 되겠다고 자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일들이 있은 후에 벌어진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형 유다의 간절한 탄원을 듣고 요셉은 모든 이집트 사람들을 다 물러가게 하고 비로소 형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힙니다. 본문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 요셉은 그 때까지 억지로 정을 억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형 유다가 자기 동생 베냐민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대신 종이 되겠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우리 형들이 드디어 온전히 변화되었구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얼마나 크게 울었는지 요셉의 울음소리가 이집트 사람에게 들렸고, 심지어 바로의 궁중에까지 들렸습니다. 요셉은 마침내 형들에게 자신이 요셉이라는 사실을 밝힙니다. “나는 요셉입니다.” 그리고 곧 아버지께서 살아 계신지 묻습니다. 본문 3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이 말씀에서 아버지께서 살아 계시느냐고 묻는 요셉의 질문은 좀 이상합니다. 지금까지 요셉의 형들은 여러 차례 아버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베냐민을 보내달라고 말한 이유도 아버지가 슬퍼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계속 아버지 이야기를 했는데 왜 요셉은 갑자기 아버지가 살아 계신지 묻고 있을까요? 여기서 아버지께서 살아 계시느냐는 말은 사실 아버지의 생사 여부를 묻는 것이라기보다 아버지의 안부를 묻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요셉은 지금까지 아버지의 안부를 자세히 물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정체를 숨겨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어지자 제일 먼저 아버지 야곱의 안부를 묻습니다. 또한 그 동안은 당신들의 아버지라고 말했지만 이제 요셉은 내 아버지가 잘 계시느냐고 묻습니다. 요셉의 말을 듣고 요셉의 형들은 놀라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합니다. 그 때 요셉이 형들을 가까이 오게 합니다. 본문 4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두려움과 충격에 떨고 있는 형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요셉은 형들에게 가까이 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요셉은 참으로 위대한 고백을 합니다. 5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이 고백에는 요셉이야기 전체를 지배하는 중요한 신학적 입장이 담겨 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거나 한탄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신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자신을 먼저 이곳에 보낸 것이라고 말합니다. 형들이 자기를 판 것도 다 온 가족을, 온 민족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라고 이해한 것입니다. 이 말을 한 번만 한 것이 아닙니다. 5-8절에서 요셉은 모두 세 차례나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자기를 보낸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다같이 7-8절을 보겠습니다. “7.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요셉은 계속 반복하여 하나님이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자신을 먼저 애굽에 보낸 것이라고 말합니다. 새번역은 8절 상반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온 민족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자신을 바로의 아버지로 삼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았으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로의 아버지로 삼았다는 말은 바로의 조언자로 삼았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셉은 이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벌어진 일이라고 두려워하는 형들 앞에서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사실 요셉은 매우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형들에게 배신당했습니다. 비록 이복형제라고 하지만 같은 아버지에게서 나온 형제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형들이 자신을 외국에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그 때부터 요셉은 매우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십대 소년 시절에 낯선 곳에서 남의 집 종살이를 했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인정받는가 싶었는데 주인의 아내가 누명을 씌워 하루아침에 죄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감옥에서도 열심히 일해서 인정을 받았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잘 해몽해 주면서 석방에 대한 희망을 갖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관원장이 요셉을 잊어버리면서 한 가닥 희망마저 사라졌습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요셉의 생애는 원망할 일투성이였습니다. 우선 자신을 팔아버린 형들이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또한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 보디발의 아내가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아내의 말만 믿고 자신을 감옥에 가둔 주인 보디발에 대해서도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자신을 기억해 달라는 요청을 까맣게 잊어버린 술 맡은 관원장에 대해서도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요셉의 인생은 원망할 것투성이였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원망하지 않고 이 모든 고난의 여정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해야 할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어떻게 요셉은 자신의 고난조차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저는 아마도 제가 요셉과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하나님을 원망했을 것입니다. 형들에게 팔려서 노예가 되고, 주인의 아내의 모함으로 죄수가 되었습니다. 아무 죄도 없이 노예가 되었고, 노예로서 열심히 일했는데 그 결과는 죄수가 된 것입니다. 아마 이런 상황에 처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 하필 나냐고 원망할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런 상황에서 원망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먼저 애굽에 보내신 이유는 형제들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이 오늘 제가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본문의 핵심적인 메시지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우리에게 닥친 고난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첫째, 우리에게 닥친 고난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이려면 평소에 늘 말씀묵상과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고난에 처했을 때 원망하는 사람과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이는 사람의 차이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인생의 인도자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인도를 따릅니다. 또한 하나님을 신뢰하려면 평소에 늘 말씀묵상과 기도 가운데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가져야 합니다. 요셉은 하나님과 깊은 사귐 가운데 살아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창세기 40장에 보면 요셉이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몽해 주는 내용이 나옵니다.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될 것이라고 해몽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요셉은 그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합니다. “당신이 복직되면 나를 기억하고 이 감옥에서 꺼내주십시오.” 그런데 안타깝게도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립니다. 그 때 요셉이 얼마나 절망했을까요? 어쩌면 요셉은 그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요셉을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그 후 2년의 세월이 흐릅니다. 감옥에서 보내는 2년은 결코 짧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2년의 세월이 흐른 후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몽하게 되면서 이집트의 총리가 됩니다. 감옥에 있던 요셉이 바로의 꿈을 정확하게 해몽합니다. 당시는 율법의 말씀이 있기 전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종종 꿈이나 환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꿈을 잘 해몽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한다는 뜻이고도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한다는 것은 결국 평소에 하나님과 깊은 사귐 가운데 있었다는 뜻입니다. 요셉은 석방에 대한 기대가 허물어진 다음에도 2년 동안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사귐을 갖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줄 아는 영적인 안목을 가졌습니다. 고난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이려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신뢰하려면 평소에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평소에는 큰 차이가 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인생에 고난이 닥치면 두 사람 사이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평소에 기도와 말씀 가운데 하나님과 사귐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기반으로 그 고통스러운 시기를 인내로 이겨낼 수 있습니다. 둘째, 우리에게 닥친 고난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이려면 과거에 경험한 작은 은혜를 잊지 말고 늘 기억해야 합니다. 요셉은 어린 시절에 받은 은혜를 평생 기억했습니다. 요셉이 어린 시절에 받았단 은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십대 소년 시절에 꾸었던 꿈입니다. 창세기 37:6-7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6.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 7.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처음에는 자신의 곡식 단이 일어서고 형들의 곡식 단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이제 37:9을 같이 보겠습니다.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그 다음에는 해와 달과 열 한 개의 별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이 바로 하나님이 요셉의 인생에 베푸신 첫 번째 은혜입니다. 요셉은 그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요셉의 형들이 이집트에 곡식을 사러 와서 땅에 엎드려 절할 때 요셉은 어린 시절에 꾸었던 꿈을 떠올렸습니다. 요셉은 그 꿈을 잊지 않았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그 당시는 꿈이 곧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이기도 하였습니다. 요셉은 어릴적 꿈을 통해 받은 계시의 은혜를 평생 잊지 않고 기억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고통스러운 삶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인생을 은혜로 받아들이려면 내가 받은 작은 은혜를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요셉은 어린 시절에 꾸었던 꿈을 마음에 깊이 간직하였습니다. 그 은혜를 쉽게 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믿는 자에게 두루 임합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 은혜를 평생 기억하는 사람이 있고, 그 시기가 지나면 잊어버리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행하신 놀라운 은혜들을 평생 기억하고 계십니까? 기도할 때마다 그 은혜를 기억하고 반복적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까?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이 오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임한 지난날의 은혜를 항상 기억하십시오. 그러면 오늘 내게 임하는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깊이 체험할 수 있습니다. 내 삶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일 줄 아는 자만이 고난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셋째, 우리에게 닥친 고난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이려면 내게 주신 은혜의 의미가 무엇인지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살면서 경험한 은혜들을 한 번 죽 반추해 보십시오. 요셉의 인생은 고난으로 점철된 인생이었습니다. 요셉이 입었던 옷으로 살펴보면 그의 인생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인생인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처음에 아버지의 집에서 채색 옷을 입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집트의 관리였던 보디발의 종이 되어 노예의 옷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것만 해도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인데 요셉의 고난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후 요셉은 보디발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혀 죄수의 옷을 입게 되었습니다. 채색 옷을 입던 사람이 노예의 옷을 입는 신세가 되었고, 노예의 옷을 입던 사람이 죄수의 옷을 입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요셉의 인생은 그렇게 점점 더 고통스러운 상황으로 내몰립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요셉의 인생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끊임없이 임합니다. 요셉의 인생에 제일 처음 임한 하나님의 은혜는 바로 어린 시절에 꾸었던 꿈입니다. 하나님은 어린 소년 요셉에게 꿈으로 은혜를 베푸십니다. 요셉의 인생에 찾아온 두 번째 은혜는 보디발의 집에서 종노릇할 때 임합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 이집트에 팔려가서 바로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디발의 종이 된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요셉의 주인 보디발조차도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결국 요셉은 그 집에서 주인에게 인정을 받아 총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그를 형통하게 하신 것입니다. 요셉이 총무가 되어 가정 살림을 맡은 후에 하나님은 요셉으로 인하여 보디발의 집에 복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요셉이 좀 더 구체적으로 경험한 두 번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요셉의 인생에 찾아온 세 번째 은혜는 요셉이 감옥에서 경험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쳤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비록 요셉은 감옥에 갇혔지만 하나님께서는 감옥에 갇힌 요셉과 거기에서도 함께 하셨습니다. 요셉은 늘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그를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자신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눈앞에서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그런 요셉에게 하나님은 인자를 더하셨습니다. 인자를 히브리어로 헤세드라고 합니다. 헤세드는 아무 조건 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일방적 은혜를 가리킵니다. 요셉은 감옥에서 조차도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조건 없는 인자(헤세드)를 체험합니다. 그래서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십니다. 보디발의 집에서는 보디발에게 신임을 얻게 하셨다면 이번에는 간수장에게 은혜를 입게 합니다. 이번에도 간수장은 모든 일을 요셉에게 맡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을 간수장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어느 곳, 어떤 상황에서도 요셉과 함께 하시고 범사에 그를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요셉의 인생에 찾아온 네 번째 은혜는 바로의 꿈을 해몽한 일을 통해 임합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자신의 해석대로 복직되는 것을 보고 요셉은 드디어 누명을 벗고 출옥할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셉이 그의 꿈을 해석해 주면서 당신이 복직되면 나를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그로부터 약 2년이 지난 후 어느 날 애굽 왕 바로가 꿈을 꾸었습니다. 두 개의 꿈을 연속하여 꾼 바로는 이집트의 점술가와 지혜자들을 모두 불렀지만 해석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제야 술 맡은 관원장이 감옥에 있는 요셉을 떠올리고 바로에게 요셉을 추천합니다. 바로에게 불려온 요셉은 그 자리에서 바로의 꿈을 해석합니다. “바로께서 꾸신 두 꿈의 뜻은 한 가지입니다. 일곱 좋은 암소와 일곱 좋은 이삭은 둘 다 칠 년을 가리킵니다. 그 후에 올라온 흉한 일곱 소와 속이 빈 일곱 이삭도 칠 년을 가리킵니다. 이 꿈은 하나님께서 앞으로 하실 일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앞으로 칠 년 동안 이집트에 풍년이 들 것이고, 그 후 칠 년 동안은 큰 흉년이 들 것입니다. 후에 든 흉년이 너무 심하여 이전에 풍년을 잊어버리고 이 땅은 기근으로 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바로께서는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택하여 이집트를 다스리게 하십시오. 칠 년 동안 풍년이 들었을 때 곡식을 거두어 저장하여 칠 년 간의 흉년에 대비하십시오. 그러면 이 나라가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셉의 해석에 감동한 바로는 요셉을 명철하고 지혜로운 자로 여겨 그 자리에서 요셉을 이집트의 총리로 삼습니다. 이 사건을 겪으면서 요셉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이제 온전히 확신하게 됩니다. 비록 형들에게 팔려 이집트에 종으로 왔지만 그런 자신과 늘 함께 하셔서 마침내 이집트의 총리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섭리를 분명히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요셉의 인생에 찾아온 다섯 번째 은혜는 요셉의 형들이 와서 자신에게 절하는 모습을 통해 경험합니다. 온 땅에 흉년이 들자 요셉의 형들도 이집트에 곡식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곡식을 사러 옵니다. 곡식을 사러 온 요셉의 형들은 이집트의 총리가 된 요셉에게 엎드려 절합니다.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요셉은 단번에 형들을 알아보았습니다. 자신에게 엎드려 절하는 형들을 보며 요셉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는 어린 시절에 꾸었던 꿈을 떠올렸습니다. 그 때는 그저 막연하게 꾸었던 꿈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꿈을 이토록 정확히 이루시는 것을 보고 요셉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요셉은 자신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점점 더 확신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희미했지만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분명하게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가 자신의 전 인생에 걸쳐 역사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와 같이 요셉의 인생에는 고난과 은혜가 함께 임합니다. 현실은 갈수록 고통스러워지지만 그런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점점 더 분명하게 임합니다. 그렇게 긴 시간을 보낸 후 요셉은 드디어 이집트의 총리가 됩니다. 만약 요셉이 자신의 지난날의 삶을 고난의 관점으로만 보았다면 아마 그는 총리의 권세로 복수의 길을 택했을지 모릅니다. 자신을 종으로 팔아버린 형들에게 복수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의 인생을 고난이라는 관점으로만 보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그런 고난 중에도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헤아려보았습니다.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던 그 순간에도 여전히 자신과 함께 하였던 그 하나님의 은혜, 그 헤세드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그 은혜들을 되새겨 보았습니다. 자신에게 임한 그 은혜들을 하나하나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비로소 요셉은 자신을 이집트로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결과 나온 고백이 바로 오늘 본문 7-8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요셉은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고난조차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지난날을 한 번 조용히 회상해 보십시오. 그 동안 얼마나 어려우셨습니까?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혹시 요셉처럼 누군가의 배신으로 고통을 겪으셨습니까? 혹시 누군가의 모함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셨습니까? 그래서 지금도 그들에 대한 원망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여러분 가운데 그런 분들이 계시다면 이제 좀 다른 관점으로 여러분의 인생을 바라보시길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관점으로 여러분의 인생을 한 번 바라보십시오. 인생의 어려운 고비가 있었을 때마다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여전히 여러분의 삶에 임하지 않았습니까?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나의 작은 신음소리마저 들으시는 우리 하나님의 세밀한 돌보심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내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곤란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전능자의 손길이 나와 함께 하심을 체험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기에 우리가 지금 이 예배의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런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 때로는 설교를 통해, 때로는 말씀묵상을 통해, 때로는 기도시간에, 때로는 사람을 통해 그 은혜로 나를 일깨워주지 않으셨습니까?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임한 우리 하나님의 그 지속적인 은혜, 우리 하나님의 헤세드를 한 번 떠올려 보십시오. 그리고 이제 그 은혜들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경험한 고난을 단순히 원망과 불평거리로만 사용한다면 그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이제 여러분이 당한 고난을 하나님의 섭리로 재해석해 보십시오. 요셉은 자신이 당한 고난을 자기 민족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로 재해석하였습니다. 우리 인생을 그렇게 새롭게 해석한다면 우리가 얼마나 놀라운 일들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요셉이 자기 민족을 구원하는 데 쓰임 받은 것처럼 우리도 내 주변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에 쓰임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떤 분들은 과거의 자신처럼 고난당하는 이를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고난 속에 빠져 원망과 불평으로 세월을 보내는 분들을 사랑으로 돌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고난조차도 그렇게 하나님의 섭리로 재해석한다면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의 구원의 도구로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의 섭리로 재해석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고난 중에 있는 이들을 주께로 이끌어 구원하는 귀한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기를 우리의 구원자와 인도자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