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정준화
조회수 1676
작성일 2017-06-01 17:38:45
함께함과 구별됨

함께함과 구별됨(출애굽기 40:34-38)

     

  오늘은 출애굽기 마지막 장 마지막 단락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출애굽기 전체의 흐름을 개괄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출애굽기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집트에서 학대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찾아가시는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그 다음에 열 가지 재앙을 통하여 애굽을 심판하고, 홍해를 건너는 기적으로 이집트를 탈출하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광야 길을 걷게 됩니다. 그 후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습니다. 그리고 출애굽기의 마지막 부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을 만들어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모든 내용이 다 끝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을 중심으로 광야 길을 행진하는 모습을 요약하는 내용입니다.

     

  본문을 읽어보시면 오늘의 말씀이 주로 성막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본문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바로 앞 단락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들어 있는 출애굽기 40장은 전체적으로 성막 봉헌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성막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성막을 봉헌합니다. 본문 33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는 또 성막과 제단 주위 뜰에 포장을 치고 뜰 문에 휘장을 다니라 모세가 이같이 역사를 마치니” 이제 모세는 성막 봉헌의 절차를 모두 마쳤습니다. 바로 이어서 34절을 보면 그러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였다고 했습니다. 성막을 봉헌하자 구름이 회막 위를 덮었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 안에 충만했습니다. 

     

  여기서 회막과 성막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40:2을 보십시오. “너는 첫째 달 초하루에 성막 곧 회막을 세우고” 이 말씀을 보면 성막, 곧 회막이라고 했습니다. 성막과 회막은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 성막은 알기 쉽게 말하자면 이동식 성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최초로 건축한 성전은 바로 솔로몬의 성전입니다. 그 전에는 공식적인 성전이 없었습니다. 그 전에는 천막으로 성전을 만들어 이동하면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막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공식적인 성전이 세워지기 전까지 바로 이 이동식 성전인 성막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성막에 대해 성경은 세 가지 명칭을 사용합니다. 그 세 가지는 바로 성막, 회막, 그리고 증거막입니다. 여기서 ‘막’이라는 글자는 천막을 가리킵니다. 이 천막을 보는 관점에 따라 성막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회막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증거막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성막이란 말 그대로 거룩한 장막이라는 뜻이고, 회막이란 회중들이 모이는 장막이라는 뜻이며, 증거막이란 증거하는 장막이라는 뜻입니다. 성막과 회막은 쉽게 이해가 되는데 증거막이라는 말은 얼른 이해가 안 됩니다. 증거막이란 증거하는 천막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증거한다는 말입니까? 여기서 증거한다는 말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을 증거한다는 말입니다. 이 성막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을 유지하고 발전시킬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언약을 맺은 두 당사자인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이곳에서 만나 함께 교제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막을 다른 말로 증거막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성막은 구체적으로 어떤 기능을 담당했을까요? 성막은 크게 세 가지 정도의 기능을 하였습니다. 첫째, 성막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하나님의 집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 작은 천막에만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온 우주를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다만 성막은 하나님이 그 백성들 가운데 거하기 위해 구별하여 만들어진 곳입니다. 둘째, 성막은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을 만나는 교제의 장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그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교제하였습니다. 셋째, 성막은 백성들이 지은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곳이었습니다. 정리하면 성막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고,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만나는 곳이며,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는 곳이었습니다. 

     

  본문 34절을 보면 성막을 봉헌한 후에 구름이 그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그 성막 안에 충만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구름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구름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을 완공하여 봉헌했을 때 하나님은 그 성막 위에 임하셨습니다. 그와 동시에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 안에 충만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크신 영광으로 성막 가운데 임재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성막에 임재하신 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줍니다. 하나님의 성막 임재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상징성을 담고 있습니다. 그 두 가지 상징성은 바로 함께함과 구별됨입니다. 그 중에 먼저 함께함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막에 임재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성막을 완공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성막에 임재 하셨습니다. 그것은 이제 하나님께서 성막을 통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신다, 임마누엘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신 하나님은 어떤 역할을 하십니까? 첫째, 하나님은 우리의 인도자가 되십니다. 본문 36-3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36.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37.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출애굽한 이후 성막을 덮은 구름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는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한다는 뜻입니다. 성막을 덮었던 구름이 떠오르면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떠오를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가라 하시면 가고, 하나님께서 멈추라 하시면 멈추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여정을 구체적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따랐을까요? 그 이유는 그들이 지금 광야 길을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광야는 먹을 것도 없고 마실 것도 없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광야에서는 반드시 가이드의 지시를 따라야 합니다. 어디에 물이 있는지, 안전한 루트가 어디인지 잘 아는 가이드의 지시를 따를 때 그 광야 길을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왜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살아야 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의 인생길이 곧 광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길 자체가 광야입니다. 우리는 지금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광야 길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하나님의 선한 인도를 따라 한 걸음씩 걸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신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의 인도자가 되십니다. 그 다음에 또 어떤 역할을 하십니까? 둘째, 하나님은 우리의 보호자가 되십니다. 본문 38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밤에는 그 구름 가운데 불이 있었습니다. 왜 낮에는 구름이 있고 밤에는 불이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광야의 날씨 때문입니다. 광야는 일교차가 매우 심합니다. 나무그늘이 없기 때문에 낮에는 매우 뜨겁고, 밤에는 온도가 급격히 떨어집니다. 그런 상황에서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어서 뜨거운 태양열로부터 보호해 주었고, 밤에는 그 구름 가운데 불이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의 추위에서 지켜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보호자이십니다. 우리의 인생도 광야의 낮과 밤처럼 순간순간 급변합니다. 언제 어떤 위험이 닥칠지 알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광야와 같은 인생에서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를 보호하시는 분입니다.  

     

  제가 앞에서 하나님의 성막 임재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상징성을 담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중에 첫째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하나님의 함께하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우리의 인도자가 되시고, 우리의 보호자가  되십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성막에 임재하신 사실이 담고 있는 두 번째 상징성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막에 임재하신 것은 하나님은 우리와 구별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본문 35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하나님께서 영광 가운데 성막에 충만하게 임하시자 모세는 감히 그 성막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와는 구별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와는 구별된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막은 이와 같이 함께 함과 구별됨, 두 가지 상징성을 동시에 담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성막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상징입니다. 하나님은 온 천하에 없는 곳이 없이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성막에만 존재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성막에 임재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막은 백성들이 사는 곳에 함께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행진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일깨우시기 위해 그 백성들 중에 성막을 치고 함께 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막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중요한 상징입니다. 

     

  그렇지만 그와 동시에 성막은 또한 하나님은 우리와는 구별된 분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출애굽기는 인간이 성막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복잡한 과정을 우리에게 설명해 줍니다. 제사장은 성전의 바깥뜰부터 시작하여 성소를 거쳐서 지성소에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 지성소에서 마침내 하나님을 만나고 죄를 용서받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스라엘과 함께 사시기 위해 성막을 짓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성막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과정이 아주 복잡합니다. 그것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와는 완전히 구별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함께 함과 구별됨을 잘 구분하여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 이 땅에 임재하신 분입니다. 그 분은 우리와 친밀한 관계 가운데 지내기를 원하십니다. 그렇지만 그 분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죄와 어울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구약 백성들은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께 나아가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제가 제한된 시간 때문에 생략했지만 출애굽기를 보면 성막에서 제사하는 제사장의 복장부터 제사장을 세우는 절차가 아주 상세하게 나옵니다. 왜 제사장의 의복까지 그렇게 신경을 썼겠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 하나님은 결코 우리가 함부로 대할 수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죄가 없으신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 분께 나아가려면 죄를 정결하게 하는 지난하고도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함께함”만 생각하고 “구별됨”을 생각하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을 바르게 만날 수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우리와는 구별된 분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그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살아야 합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서 저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본문 38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광경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는 이 놀라운 광경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목격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다수는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가나안에 들어가는 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너무 어이없는 일이 아닙니까? 어떻게 이토록 장엄한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는 데 실패한단 말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이런 기적이 우리를 인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기적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는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기적을 경험한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기적을 통하여 그 기적을 행하신 우리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와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출애굽기 24:7-8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7.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8.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준행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그 언약의 피를 백성들에게 뿌렸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언약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 언약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언약의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로 그 백성을 인도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장엄한 광경을 보고도 언약의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이제 새로운 세대를 일으켜 새 일을 행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새로운 세대들을 가나안 땅에 정착시키고 그들을 통하여 성전을 건축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이동식 성전이 아니라 웅장하게 지어진 성전에 임하셨습니다. 처음에 백성들은 환호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언약의 하나님을 외면하였습니다. 성전의 제사는 형식적인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그저 형식적으로 양이나 소를 잡아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는 전혀 순종하지 않은 채 수없이 많은 제물만 죽여서 바쳤습니다. 하나님은 결국 이방나라를 들어서 그 성전을 모조리 파괴하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에만 마음을 빼앗겨 막상 언약의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초강수를 두신 것입니다. 

     

  그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긴 어둠의 시간을 보냅니다. 더 이상 예언자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도 임하지 않는 영적인 암흑기를 보내게 됩니다. 그 긴 암흑기를 보낸 후 하나님은 당신이 유일하게 낳으신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이제 참 성전이, 참 성막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구약의 성막이나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진정한 성막, 진정한 성전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14은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 구절에서 ‘거한다’는 동사는 본래 ‘천막’이라는 명사의 동사형입니다. ‘텐트를 치다’라는 뜻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성막을 짓고 거주하셨지만 신약시대에는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 사도 요한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과 함께 살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감격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구약시대에 성막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려면 제사장을 통해 복잡한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성막이신 예수님은 친히 육신을 입고 오셔서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지성소와 성소를 가르는 휘장을 찢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활짝 여셨습니다. 그 은혜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그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는 하나님께 쉽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죽음이라는 결코 쉽지 않은 값을 지불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 후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이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성령을 마음에 모신 자들이 바로 성전이고 성막입니다. 에베소서 2:20-22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곧 성전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우리는 모퉁잇돌이신 예수님 위에 세워진 성전입니다. 벽돌 한 장 한 장이 모여서 예루살렘 성전을 이룬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곧 성전입니다. 고린도전서 3:16-17도 역시 우리를 성전으로 비유합니다. 고린도전서 3:16-17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왜 신약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성전이라고 말합니까? 광야의 성막이나 예루살렘 성전이 성전일 수 있는 이유는 그 안에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시기 때문입니다. 텐트가 값비싼 것이라서 성막인 것은 아닙니다. 고급 자재를 사용해 지었기 때문에 성전인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시기 때문에 성막이고 성전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모신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곧 성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외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두 가지 마음을 요구합니다. 첫 번째 마음은 나와 함께 하시는 것에 대한 감사와 감격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내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은 참으로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 한 번 나아가려면 그 과정이 보통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직접 나아가지도 못하고 제사장을 통하여 제물을 바치고, 손을 씻고 조심스럽게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그런 과정, 그런 절차를 밟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안에, 바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우리 안에 함께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두 번째 마음은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내 안에 거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두려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죄와 더불어 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죄를 지을 때마다 성령님께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3:17에서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와는 다른 구별된 존재이신 하나님의 성령께서 나와 같은 죄인 안에 거하시다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지 마십시오. 이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 믿는 성도가, 곧 내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을 모시고 다니는 자입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함께 가십니다. 내가 가정에 가면 우리 가정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계십니다. 내가 직장에 가면 우리 직장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가십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우리 안에 사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하나님을 판단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성경을 보고 하나님을 알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보고 하나님을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을 모신 성전이라는 사실은 감사한 일이면서 동시에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바울이 에베소서 4:25-32에서 에베소 교인들에게 권면한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적절한 권면이 됩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모시고 살아가는 이동식 성전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참으로 적절한 권면입니다. 우리 다 같이 에베소서 4:25-32을 천천히 읽음으로 오늘 주일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25.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26.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28.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29.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30.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31.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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