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김성윤 | ||
조회수 | 1280 | ||
작성일 | 2017-06-17 16:32:55 |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사무엘상 15:22-23)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오늘 본문은 오랫동안 교회를 다닌 분들이라면 최소한 한두 번은 설교를 들어본 말씀일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 가운데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이 가장 널리 알려진 말씀일 것입니다. 주일학교 공과에서도 거의 항상 다루는 말씀이기도 하기 때문에 어린 시절 교회를 다니신 분들은 아마 이 말씀을 다들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저는 주일학교를 다니지 못해서 주일학교 때 듣지는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할 때 초등부 아이들을 가르쳤던 기억은 있습니다. 오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면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먼저 이 말씀의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 이스라엘은 사사시대를 맞이하였습니다. 사사시대는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습니다. 사사시대의 혼란상은 사사기 21:25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 사사시대의 끝 무렵에 등장한 인물이 바로 사무엘입니다. 흔히 사무엘을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라고 부릅니다. 사무엘은 사사시대를 끝낸 인물이면서 왕정시대를 새롭게 연 인물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사무엘은 베냐민 지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웁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초창기에는 순수한 마음으로 나라를 이끌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정체성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울이 저지른 잘못된 행동 가운데 대표적인 사건은 사무엘상 13:8-9에 나오는 제사 집례건입니다. 우리 사무엘상 13:8-9을 같이 보겠습니다. “8.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9.사울이 이르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제사를 집례해야 하는 사무엘이 정한 기한에 도착하지 않자 사울이 직접 번제를 주관합니다. 이스라엘의 왕에게는 제사 집례권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불법적으로 제사를 집례합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이방나라의 왕과 같은 절대군주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철저히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러므로 왕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명령을 어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울은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자신이 불법적으로 제사를 집례한 것입니다. 그 사건을 겪은 후 사무엘은 사울의 왕권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오늘 본문이 들어 있는 사무엘상 15장은 그 후에 벌어진 일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하여 아말렉과 싸워 그 민족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아말렉이 이스라엘 민족을 대적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군사를 모집하여 아말렉과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 전쟁에서 사울과 이스라엘군은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울과 이스라엘 군이 아말렉의 양과 소 가운데 좋은 것은 남겨두고 하찮은 것만 진멸한 것입니다. 사울은 모든 것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역했습니다.
사울이 명령을 거역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사무엘은 근심하며 밤새 기도합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사무엘은 사울을 찾아가 그를 책망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말렉의 모든 것을 진멸하라고 했는데 왜 임의로 좋은 것은 구별하여 남겨 두었느냐고 책망합니다. 그러자 사울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해 좋은 것을 구별하여 남긴 것이라고 변명합니다. 그 때 사무엘이 한 말이 바로 오늘 본문 22-23절입니다. 본문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22.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사무엘이 책망하자 사울은 제사를 드리기 위해 남겨두었다고 핑계를 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울이 마치 생명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일부를 남긴 것처럼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생명을 존중하는 사울이 생명을 모조리 말살하라는 하나님의 괴팍한 명령에 순종하지 않은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울이 일부를 남긴 것은 생명을 존중하는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사울과 이스라엘군은 다만 값진 것에 대한 탐욕 때문에 일부를 남긴 것입니다. 사울이 변명하는 것을 보고 사무엘은 핵심을 찌릅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습니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한 가지입니다. 바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이 말을 한 의도는 분명합니다. 사울은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해 일부를 남겨둔 것이라고 변명했습니다. 그러자 사무엘은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보면 마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과 제사를 드리는 것이 양자택일의 문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단순히 둘 중에 순종이 더 낫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15장 전체의 흐름을 보면 사울이 제사를 드리려고 남겼다는 말은 그의 본심이 아닙니다. 그는 다만 탐욕 때문에 일부를 남긴 것입니다. 그러다가 사무엘의 책망을 듣자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은 제사가 필요하지 않다거나 혹은 제사가 덜 중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희생제사도 하나님을 향한 순종의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순종이 없이 형식적으로 드리는 제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결국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3절에서는 순종이 제사보다 나은 이유를 설명합니다. 23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사무엘은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다고 말합니다.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께 의도적으로 불순종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완고한 것도 비슷합니다. 완고하다는 것은 교만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점치는 죄와 우상숭배는 둘 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점을 치고 우상숭배를 합니다. 그러므로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완고하게 자기 고집만 부리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불신앙과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결국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은 참된 순종이 담기지 않은 형식적인 제사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말씀입니다.
구약성경은 참된 순종이 담기지 않은 형식적인 제사에 대해 강하게 비판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런 행태를 강하게 질타하였습니다. 먼저 아모스 5:21-24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21.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22.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23.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24.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하나님은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고 멸시한다,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받지 않을 것이고, 살진 희생의 화목제를 드려도 돌아보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예배 가운데 드리는 찬송과 연주도 그치라고 하셨습니다. 다만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희생제사를 거부하고 계실까요?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 없는 제사를 드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중심 사상은 순종입니다. 희생제사도 순종의 일환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모스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의를 행하라는 말씀에는 순종하지 않으면서 그저 형식적인 희생제사만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하나님은 그런 의미 없는 제사는 당장 중단하고 일상생활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하라고 외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제사는 그만 드리고, 가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아모스만 이런 메시지를 외친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도 비슷한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이사야 1:11-17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11.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16.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17.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이 말씀의 핵심도 역시 아모스의 예언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은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제사를 드리러 오는 것은 마당만 밟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는 드려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고 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희생제사는 그만 드리고 가서 율법의 중심사상을 따라 순종하라는 말입니다.
이런 사상은 구약에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1:42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렸지만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렸다고 책망하셨습니다.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말하자면 예식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런 예식은 잘 행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공의와 사랑은 행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을 따른다면 제사는 잘 드렸지만 순종은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도 역시 구약 백성들처럼 율법의 외형적 형식은 잘 지켰지만 막상 율법의 중심 사상인 순종은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일들은 교회 역사 속에서도 반복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중세기 교회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중세기 교회의 사제들이 얼마나 종교적 형식을 잘 지켰습니까? 그들은 아주 성실하게, 매우 철저하게 예배를 드렸습니다. 중세기에 건축한 교회 건물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엄청난 돈을 들여 웅장한 성전을 지었습니다. 매 주일 그 곳에서는 아름다운 예배가 드려졌습니다. 사제들은 라틴어로 미사를 집전했습니다. 그 아름답고 웅장한 예배당에서는 찬송을 부르면 하늘에 닿을 듯 울려 퍼집니다. 그렇지만 중세기 교회는 막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 사례는 중세기 교권주의자들이 개혁자들을 무자비하게 박해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교개혁자라고 하면 주로 루터와 칼빈만 떠올립니다. 그런데 그들보다 앞선 시대에 위대한 종교개혁자들이 있었습니다. 중세기 교권주의자들은 그런 개혁자들을 무자비하게 핍박하였습니다.
오늘 제가 그 가운데 중세기 교권주의자들에게 무자비하게 핍박을 당한 두 사람을 여러분에게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은 존 위클리프입니다. 존 위클리프는 최초로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사람입니다. 그 이전까지 헬라어 성경은 오직 라틴어로만 번역되었습니다. 그 결과 소수의 사제들만 성경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사제들은 헬라어 성경 외에는 라틴어 성경만이 진정한 성경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천박한 영어나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면 무지한 대중들이 잘못 번역된 성경을 읽고 이단적 사상을 갖게 될 것이라고 염려하였습니다. 그러나 위클리프는 일반 민중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1382년에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였습니다. 그 후 그의 성경번역을 반대하는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그의 저술이 불태워지고, 이단으로 정죄를 받고, 출교당하는 등 모진 핍박을 받았습니다. 결국 위클리프는 성경을 번역한 후 2년 뒤 뇌졸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충격적인 사실은 그가 죽은 후 공회의 결정에 따라 그를 무덤에서 꺼내어 다시 화형시키는 영국식 부관참시를 시행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후 또 다른 개혁자 윌리엄 틴데일도 비슷한 상황을 맞이합니다. 위클리프가 라틴어성경을 영어로 번역했다면 틴데일은 헬라어 성경을 영어로 직접 번역하였습니다. 그도 역시 위클리프처럼 성경을 일반 민중들에게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교권주의자들은 그런 시도를 라틴어 성경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틴데일도 역시 당시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무지막지한 핍박을 당했습니다. 결국 틴데일은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다는 이유로 화형을 당합니다. 본래 틴데일에 대한 사형방법은 목 졸라 죽인 후 화형시키는 것이었는데, 집행자가 실수하여 완전히 죽지 않은 상태에서 화형을 시켰습니다. 불에 타면서 마지막 순간에 윌리엄 틴데일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여, 영국 왕의 눈을 뜨게 하소서!” 나중에 윌리엄 틴데일의 번역을 수정하여 출판한 성경이 바로 그 유명한 킹제임스번역입니다. 킹제임스번역이란 영국의 제임스 왕의 주도 아래 번역된 영어성경을 가리킵니다.
위클리프를 부관참시하고, 틴데일을 화형시킨 사람들이 바로 제도화된 종교인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던 세계에 갇혀 있었습니다. 라틴어 성경으로 화려한 예전을 드리는 것을 최선의 종교 행위로 여겼습니다. 중세기 교회의 예배는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화려한 예배를 드리던 사람들이 성경을 자신들의 언어로 번역했다는 이유로 개혁자들을 무자비하게 핍박했습니다. 예배는 잘 드렸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에게는 율법의 참된 정신인 공의와 사랑이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에 따른다면 그들은 제사는 잘 드렸는지 모르지만 막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면 어떻게 그렇게 종교개혁자들을 불의한 방식으로 무자비하게 핍박할 수 있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 신앙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신구약성경과 교회역사는 이것이 결코 쉽지 않은 싸움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잘 보여줍니다. 성경과 교회 역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적 형식을 앞세우면서 막상 성경의 중심 사상인 순종은 가볍게 여겼다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사울은 제사를 드리겠다는 핑계로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습니다. 구약시대 왕들과 제사장들은 희생제사는 열심히 드렸지만 막상 하나님 말씀의 핵심사상인 공의와 사랑은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온갖 것들의 십일조는 철저하게 지켰지만 하나님의 명령인 공의와 사랑은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중세기 교회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어마어마한 성전을 짓고 화려한 예배를 드렸지만 막상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해야 한다고 외친 개혁자들을 무자비하게 핍박했습니다. 그것이 지나간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는 이런 문제에서 자유롭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도 동일한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한국교회도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는 대체로 열심히 드리는 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예배와 우리의 일상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믿음이 좋은 장로님인데 회사에서는 하청업체에 갑질을 일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에서는 믿음이 좋은 집사님인데 공직사회에서는 상종 못할 사람으로 소문이 파다한 기독교인들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것은 신구약성경이 일관되게 주장하는 성경의 중심사상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1-2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1.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영적 예배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공적인 예배도 함부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은 예배는 아무렇게나 드려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일날 예배드리는 것처럼 일상에서도 그렇게 예배자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이 바로 영적인 예배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곧 이어 그런 영적인 예배를 드리기 위해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권고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그 뜻대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진정한 영적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을 꼭 기억하십시오. 일평생 기억하십시오. 예배를 소홀히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배는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는 잘 준비된 경건한 예배를 드리기에 힘써야 합니다. 다만 순종 없는 예배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참된 예배는 한 주간 동안의 삶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순종하는 삶이 곧 참된 예배의 시작입니다. 물론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교회 안에서 주로 사는 저와 같은 목사보다 험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훨씬 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이 진리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순종이 담긴 예배를 드리기 위해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갈라디아서 6:9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왜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고 했겠습니까? 낙심할 일이 많기 때문에 낙심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순종하면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거두게 될 줄로 믿습니다. 평강의 주께서 때마다 일마다 여러분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