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박경진 | ||
조회수 | 1321 | ||
작성일 | 2017-07-16 13:07:26 |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
2017년 07월 16일 주일 2부 예배 안진섭 목사(새누리2교회) from saenuree2 on Vimeo.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열왕기상 18:30-40)
오늘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갈멜산 전투에 관하여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성경에는 익숙한 본문도 있고, 조금은 낯선 본문도 있습니다. 어떤 설교자들은 낯선 본문을 어려워하지만 저는 오히려 익숙한 본문이 설교하기에 더 어렵습니다. 잘못하면 이미 다 알고 있는 뻔한 이야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인 갈멜산 전투가 그렇습니다. 갈멜산 전투 이야기는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닌 분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런 본문을 대할 때는 오히려 본문을 연구하는 일에 더욱 공을 들입니다. 마치 평소에 잘 알지 못하던 본문을 대하는 것처럼 조금은 낯설게 본문을 바라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야 이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를 보다 깊게 찾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본문을 낯설게 본다고 해서 제가 완전히 독특한 새로운 해석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식의 접근은 오히려 성경을 왜곡할 수 있습니다. 제가 조금은 낯설게 본문을 관찰한다고 한 것은 이 본문을 잘 안다고 단정하지 않고 처음부터 차근차근 살펴보겠다는 뜻입니다. 오늘 설교의 본문은 갈멜산 전투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저는 갈멜산 전투의 앞뒤에 있는 내용들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럴 때 갈멜산 전투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좀 더 확실하게 드러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 엘리야의 제안 – 갈멜산 전투
북 이스라엘의 왕 아합은 역대 최악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시돈의 공주 이세벨과 결혼하여 온 나라를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하는 곳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비판하는 엘리야에 대해서는 지명수배령을 내렸습니다. 한 동안 엘리야는 아합을 피해 숨어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엘리야는 자신을 드러냅니다. 엘리야는 오바댜라는 아합의 신하를 통해 아합에게 자신을 드러냅니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한 가지 중요한 제안을 합니다. 엘리야가 아합을 만나 제안하는 내용을 같이 살펴보겠습니다.
열왕기상 18:16-19을 같이 보겠습니다. “16.오바댜가 가서 아합을 만나 그에게 말하매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러 가다가 17.엘리야를 볼 때에 아합이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18.그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 19.그런즉 사람을 보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을 갈멜 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아오게 하소서”
엘리야는 아합에게 정면대결을 제안합니다. 과연 누가 참 신인지 대결해 보자는 것입니다. 바알이 참 하나님인지, 아니면 여호와가 참 하나님인지 대결해 보자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갈멜산으로 불러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 곳에서 자신과 대결하여 누가 참 신인가를 확인해 보기 위해서입니다. 이에 아합은 이스라엘 모든 자손들에게 사람을 보내 선지자들을 모으게 합니다. 백성들이 모이자 엘리야는 먼저 백성들을 책망합니다. 18:21을 같이 보겠습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바알도 함께 섬기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바알이 날씨의 신이라서 추수를 관할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여호와 하나님은 시내 광야에서 온 신이라서 가나안에서 농사를 짓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 때문에 농사를 지으려면 여호와만으로는 부족하고 농사의 전문가인 바알도 함께 섬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는 말은 바로 그런 혼합주의적인 생각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이제 엘리야는 백성들에게 누구를 섬길지 결단하라고 촉구합니다. 엘리야의 말을 듣고 백성들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합니다. 여호와만 섬기겠다고 결단한 능력은 없고, 그렇다고 바알만 섬긴다고 하기는 부끄러운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이제 엘리야는 놀라운 제안을 합니다. 그것은 바로 송아지 두 마리를 잡아서 제단에 올려놓은 상태로 불은 붙이지 말고 각자 자기 신의 이름을 불러서 불로 응답하는 신을 참 신으로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파격적인 제안에 백성들은 다들 좋다고 호응합니다. 어떻게 엘리야는 이런 대담한 제안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주 여호와가 하나님이라는 담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확신이 없었다면 어떻게 이런 제안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2. 불을 구하는 기도
이제 바알 선지자들과 엘리야가 불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기 시작합니다. 당시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합하여 상대편 진영에서는 모두 850명의 선지자들이 나와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에게 먼저 기도를 시작하라고 제안합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은 송아지를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부르며 응답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었습니다. 다만 바알의 선지자들만 열광적으로 뛰어노는 형국이었습니다. 정오가 되자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들을 조롱합니다. 18:27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정오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엘리야는 바알이 응답하지 않는 이유를 열거합니다. 묵상중일 수도 있고, 잠깐 나갔을 수도 있고, 길을 걷는 중일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면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조롱합니다. 여기서 나갈 수도 있을 것이라는 말은 아마도 용변을 보러 나갔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뜻인 것 같습니다. 엘리야의 말은 일차적으로 조롱의 뜻입니다. 그렇지만 사실 고대 근동 사람들은 신을 인간과 비슷한 수준에서 한 두 가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존재로 여겼습니다. 고대 근동의 신화들을 보면 신이 사냥하러 가고, 한 여신을 두고 질투하는 등 인간적인 행동을 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따라서 엘리야의 말은 요즘 말로 하면 일종의 팩트 폭격, 곧 사실에 기반한 조롱입니다. 엘리야가 조롱하자 그들은 더욱 큰 소리로 신을 부릅니다. 나중에는 칼과 창으로 자기 몸을 상하면서까지 간구합니다. 그러나 결국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18:29은 세 개의 부정적인 어구로 아무 응답이 없는 현실을 표현합니다. “이같이 하여 정오가 지났고 그들이 미친 듯이 떠들어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르렀으나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나 돌아보는 자가 아무도 없더라”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고, 아무 돌아보는 자도 없었습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 열광적인 태도가 예배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열광적인 예배 태도로 본다면 바알의 선지자들만한 예배자들이 있겠습니까? 그들은 하루 종일 뛰어놀면서 예배드렸습니다. 심지어 자기 몸을 상하면서까지 희생적으로 예배드렸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예배 태도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배를 받으시는 대상을 바르게 알고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 대상을 향하여 예배드리는 사람의 마음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이제 엘리야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먼저 백성들을 가까이 오게 한 후 무너진 제단을 수축합니다. 아마도 바알의 숭배자들이 열광적인 제사를 드리면서 제단의 일부가 무너진 것 같습니다. 엘리야는 먼저 그 제단을 수축합니다. 사실 평소 같으면 바알을 숭배하는 곳에 이런 제단을 수축하는 것 자체가 비난받을 일입니다. 왜냐하면 제사는 오직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평상시가 아닙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어디에서 예배를 받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과연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이스라엘에서 예배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야곱의 열두 아들의 숫자를 따라 열두 개의 돌을 취하여 제단을 수축합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이루었고 그들은 곧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구성하였습니다. 따라서 열두 개의 돌로 제단을 수축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참된 정체성을 회복하기를 바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엘리야는 특이한 지시를 합니다. 엘리야는 제단 주위에 도랑을 파고 제단에 물을 붓게 합니다. 백성들은 엘리야의 지시를 따라 한 번에 네 통씩 세 차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물을 붓습니다. 왜 엘리야는 이런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행동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 제단의 제물과 나무에 물을 부은 이유는 어느 누구도 불로 임한 기적을 우연이라고 말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둘째로, 열두 통의 물을 모두 쏟아버림으로써 엘리야는 하나님이 곧 비를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표현한 것입니다. 당시는 3년 간의 가뭄으로 온 나라가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라서 한 통의 물도 귀할 때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열두 통의 물을 모두 쏟아버린 것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불을 주실 뿐만 아니라 비도 주실 것을 확신한 것입니다.
저녁 때 이제 엘리야가 간구하기 시작합니다. 엘리야의 간구는 바알의 선지자들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엘리야는 크게 소리를 지르지 않습니다. 춤도 추지 않습니다. 자기 몸을 상하게 하지도 않습니다. 엘리야는 다만 기도할 뿐입니다. 엘리야의 기도는 간단합니다. 엘리야는 먼저 하나님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 다음에 세 가지 기도를 드립니다. 첫째,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하옵소서. 둘째, 내가 주의 종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셋째,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이 세 기도를 보면 엘리야의 우선순위가 잘 나타납니다. 자신이 주의 종임을 알게 해 달라는 기도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참 하나님으로 인정되기를 바라는 두 개의 간구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결국 엘리야의 기도의 핵심은 주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이제 엘리야는 마지막으로 간절히 이렇게 기도합니다. 18:37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엘리야는 두 번 반복하여 응답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주 여호와가 하나님이신 것과 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엘리야가 기도를 마쳤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18:38을 같이 보겠습니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기도를 마치자 여호와의 불이 내려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모두 태웠습니다. 심지어 도랑의 물도 모두 삼켜버렸습니다. 이것으로 승부는 끝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이 날씨를 주관한다고 생각했지만 날씨를 주관하시는 분은 바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에 번개를 보내 번제물과 제단까지 태워버렸습니다. 그러자 비로소 모든 백성이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18:39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이 말은 단순히 하나님이 바알보다 더 큰 신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한 분뿐인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선언하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간구를 한 번 바알의 선지자들의 간구와 대조해 보십시오. 바알의 선지자들은 소리를 지르고 춤을 추며 열광적으로 불을 내려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들의 몸을 상하면서까지 불을 내려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단순하게 기도했습니다. 불을 내려서 여호와가 하나님이신 것을 이 백성들이 보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크게 소리를 지르지도 않고, 열광적으로 춤을 추지도 않았습니다. 당연히 자기 몸을 자해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떻게 엘리야는 이렇게 한편 담백하게, 한편 담대하게 기도할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여호와의 선지자는 자신밖에 안 남았다고 할지라도 여호와가 하나님이신 것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결국 엘리야는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고 바알의 선지자들은 모두 도륙을 당하였습니다.
3. 비를 구하는 엘리야의 기도
갈멜산 전투에서 승리한 후 엘리야는 아합에게 올라가서 먹고 마시라고 권합니다. 비록 타락한 왕이지만 엘리야는 아합에게도 승리한 자의 만찬에 참여할 기회를 줍니다. 그러면서 곧 큰 비가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합이 잔치에 참여하러 올라가자 엘리야는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땅에 꿇어 엎드려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사환에게는 바다 쪽을 살피하고 합니다. 사환은 가서 보고 아무 것도 없다고 보고합니다. 그렇게 일곱 번을 반복합니다. 그런데 일곱 번째에 사환이 보고합니다.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이 떠올랐습니다.” 엘리야는 곧 사환에게 가서 아합 왕에게 비를 맞지 않도록 마차를 타고 내려가라고 전하게 합니다. 조금 후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해지며 큰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왜 엘리야는 갈멜산 전투에서 승리한 후 곧 비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을까요? 하나님은 지난 3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 비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런 사실을 이미 선포하였습니다. 열왕기상 17:1을 같이 보겠습니다.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그러다가 3년이 지난 후 하나님은 이제 비를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18:1을 보겠습니다. “많은 날이 지나고 제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이 약속의 말씀을 듣고 엘리야는 갈멜산 전투를 벌인 것입니다. 갈멜산에서 불로 응답하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비를 주실 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아니 사실상 갈멜산 전투의 결실은 바로 그 땅에 비가 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비를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메마른 땅에 비를 주셔야 하나님이 진정으로 날씨를 주관하는 신으로 인정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비를 달라고 기도한 것도 역시 엘리야가 여호와는 하나님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엘리야는 작은 구름을 보고 비가 온다고 확신한 것입니다.
4. 엘리야의 절망
엘리야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내면 딱 좋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어지는 열왕기상 19장에서 우리는 매우 당혹스러운 상황을 직면하기 때문입니다. 아합은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을 자기 아내 이세벨에게 전합니다. 그러자 이세벨은 엘리야에게 사신을 보내어 엘리야를 반드시 죽이겠다고 위협합니다. 이세벨은 심지어 자신이 엘리야를 죽이지 못하면 신들이 자신에게 벌을 내릴 것이라고 저주하기까지 합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엘리야를 죽이겠다는 뜻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엘리야는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로 도망갑니다. 그 곳에 사환을 머물게 하고 자신은 광야로 하룻길쯤 더 들어갑니다. 그리고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청합니다. 열왕기상 19:3-4을 같이 보겠습니다. “3.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4.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엘리야는 로뎀 나무 아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이 상황을 한 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세벨의 위협을 듣고 엘리야는 처음에 브엘세바로 도망했습니다. 브엘세바는 남쪽 유다에 속한 지역입니다. 그 말은 북 이스라엘의 국경을 벗어났다는 말입니다. 사실 그 정도 도망갔으면 안전합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그 정도로 안심하지 못하고 남쪽으로 하룻길쯤 더 내려갑니다. 유다의 국경마저 벗어난 것입니다. 그 곳까지 도망한 후 엘리야는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달라고 요청합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조금 전에는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와 혈혈단신 맞장을 떴습니다. 그리고 멋지게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순간에 그는 지극히 연약한 자의 모습으로 도망쳐서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엘리야의 문제가 무엇일까요? 엘리야는 참으로 위대한 영적 전사입니다. 그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가 착각한 것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참된 하나님의 사람은 오직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엘리야는 여러 차례 그런 말을 반복합니다. 열왕기상 18:22을 보겠습니다.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명이로다” 엘리야는 여호와의 선지자가 자신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한 번만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19:9-10을 같이 보겠습니다. “9.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0.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엘리야가 낙심하여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묻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그 때 엘리야가 뭐라고 합니까? 엘리야는 자신이 한 일을 말하면서 이번에도 자신만 남았다고 합니다. 19:13-14을 같이 보겠습니다. “13.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4.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엘리야는 다시 한 번 오직 자신만 남았다고 말합니다.
엘리야는 계속 여호와의 선지자는 자신만 남았다고 합니다. 엘리야는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약 여호와의 선지자는 자신만 남았다면 오바댜가 숨겨준 100명의 선지자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우리 18:13을 보겠습니다.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일 때에 내가 여호와의 선지자 중에 백 명을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로 먹인 일이 내 주에게 들리지 아니하였나이까”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일 때 아합의 신하인 오바댜는 은밀하게 백 명의 선지자를 숨겨주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선지자가 아닙니까? 또한 오바댜는 어떻습니까? 비록 선지자는 아니지만 그도 역시 엘리야를 돕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비록 아합의 신하의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오바댜도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만 남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곧 이세벨이 자신을 죽일 것이고 그러면 자신이 그 동안 애썼던 하나님 나라 운동은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토록 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모습은 충성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나타날 수 있는 전형적인 탈진 증세입니다. 대다수의 성도들이 배교의 길로 갈 때 홀로 참 신앙을 지키는 사람들은 종종 이런 식으로 탈진합니다. 내가 속한 직장에서 대부분이 부정직하게 일하는데 자신만 홀로 정직하게 일하다 보면 어느 순간 세상에 자신만 남은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충성되게 일하다가 한 순간에 지쳐서 탈진합니다. 초대교회를 온전히 회복하겠다는 열망을 가진 목회자들도 이런 현상을 경험합니다. 어느 누구보다 바르고 신실하게 목회한다고 생각하는데 한 순간에 지쳐서 낙심합니다. 세상에 진실한 목회자는 자신밖에 없고, 참된 교회는 자기 교회밖에 없는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렇게 탈진한 엘리야를 어떻게 일으켜 세우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지친 엘리야에게 먹을 것을 줍니다. 19:5-6을 같이 보겠습니다. “5.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6.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주신 음식을 먹고 그 힘으로 40일 걸려 호렙산으로 갑니다. 호렙산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사명을 주신 곳이며, 또한 십계명의 말씀을 주신 곳입니다. 하나님은 그 곳에서 엘리야에게 묻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그러자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엘리야는 자신만 남았다고 대답합니다.
이제 하나님은 엘리야를 그 산에 서게 하고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우리 19:11-13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11.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13.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처음에 하나님은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크고 강한 바람을 일으키십니다. 그러나 그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바람 후에 지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지진 후에 불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그 세미한 소리를 듣고 얼굴을 가립니다.
이 사건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바로 얼마 전에 불로 임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불 가운데서 임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세미한 소리로 임하십니다. 존 빔슨(John J. Bimpson)이라는 구약학자는 여기서 세미한 소리를 “짧은 침묵의 소리”라고 해석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세미한 소리, 혹은 조용한 속삭임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왜 빔슨은 이렇게 해석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앞선 소리들 때문입니다. 강한 바람 소리, 지진, 불 등과 비교하면 조용한 속삭임은 거의 침묵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그는 짧은 침묵의 소리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렇게 침묵의 소리로 자신을 계시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항상 갈멜산 사건처럼 그렇게 눈에 띄는 방식으로 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침묵 가운데 일하십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침묵 가운데서도 자기를 계시하는 분입니다. 그 사실을 깨우쳐 주기 위해 하나님은 침묵의 소리로 계시하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다시 엘리야에게 9절과 똑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에 있느냐?” 19:14을 다시 보겠습니다.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침묵의 소리를 듣고서도 여전히 동일하게 대답합니다. “나만 남았습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당신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19:15-17을 같이 보겠습니다.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16.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17.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세 사람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명하십니다. 첫 번째는 하사엘에게 기름 부어 아람의 왕으로 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는 것이며, 세 번째는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엘리야의 후계자로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침묵 속에서도 당신의 일을 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새로운 인물들을 일으켜 나라를 정화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만 사용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엘리야가 죽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선지자를 들어 당신의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그 사실을 가르쳐 주십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놀라운 격려의 말씀을 주십니다. 19:18을 같이 보겠습니다. “18.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이스라엘 가운데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을 남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계속 자신만 남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칠천 명의 남은 자를 두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살다보면 담대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당연히 우리 하나님의 역사하심입니다. 그렇지만 때로는 하나님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세상에 참된 신자는 나밖에 없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고립된 채 바르게 살려고 애를 쓰는데 하나님은 전혀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 것처럼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불로 역사했는데 지금은 그런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방법은 매우 다양합니다. 때로는 바람과 지진과 불로 역사하시지만 때로는 조용한 침묵 가운데 역사하기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여전히 우리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지금도 오직 여호와만이 참된 하나님이십니다.
다 썩었다고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한국교회가 부패했다고 너무 절망하지 마십시오. 우리 한국교회를 지킬 사람이 없다고 탄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지금도 조용히 일하십니다. 침묵 가운데 일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그 분은 당신의 주권에 따라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십니다. 우리만 남은 것이 아닙니다. 나만 남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 땅 곳곳에 신실한 주님의 백성들을 남기셨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우리의 다음 세대를 이어갈 신실한 주의 백성들을 세우고 계십니다. 우리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어떤 때는 불로 역사하실 것이고, 어떤 때는 조용히 침묵 가운데 역사하실 것입니다. 역사하는 모습은 달라도 주 여호와는 언제나 한결같이 하나님이십니다. 이번 한 주간도 그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내게 주어진 사명의 자리에서 충성을 다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