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박경진 | ||
조회수 | 1369 | ||
작성일 | 2017-07-23 13:15:09 |
역사의 교훈 |
열왕기상하에서 배우는 교훈(열왕기하 25:8-12)
서론
오늘 설교의 본문은 남 유다가 멸망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오늘 열왕기상하에 기록되어 있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서 오늘 우리를 향한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굳이 유명한 역사가들의 명언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역사를 바르게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에는 누구나 공감할 것입니다. 역사가들이 자기 시대의 역사를 기록하는 이유는 대체로 다음 세대에게 소중한 교훈을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성경 역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역사를 기록한 이유는 다음 세대가 앞 세대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고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가도록 돕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열왕기상하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서 오늘 우리 시대를 향한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1. 열왕기상하의 내용
열왕기상하는 다윗의 노년의 모습으로 시작하여 남 유다의 멸망으로 끝납니다. 열왕기상 1-2장은 전성기를 지나 이제는 노쇠한 다윗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솔로몬이 왕위를 계승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 후 왕이 된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주신 탁월한 지혜로 나라를 잘 정비하여 이스라엘을 근동지역의 강자로 만듭니다. 솔로몬이 통치할 때는 백성들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했으며 주변 나라들은 이스라엘에 조공을 바쳤습니다. 솔로몬은 또한 각종 건축사업을 벌였습니다. 화려한 왕궁과 웅장한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솔로몬 시대의 영화를 보여주는 단적인 표현이 은을 귀히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솔로몬은 나중에 이방여인들을 아내로 맞이하면서 그들이 들여온 우상숭배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 여파로 솔로몬 사후에 이스라엘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나라가 둘로 분열된 후 북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신하였던 여로보암이 다스렸고 남 유다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다스렸습니다. 그 후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에는 각각 20명씩의 왕들이 있었습니다. 북 왕국은 20명의 왕들이 모두 210년 동안 다스렸습니다. 한 왕의 평균 통치 기간은 평균 10년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또한 북 왕국에는 모두 9개의 왕조가 있었습니다. 한 왕조에서 나온 왕의 숫자가 평균 2명꼴입니다. 그것은 곧 북 왕국에는 끊임없이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정상적으로 왕자가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고 쿠데타로 새로운 왕조가 집권하는 일이 반복적으로 벌어졌습니다. 북 왕국의 왕 20명 가운데 무려 일곱 명의 왕들이 암살을 당했습니다. 한 마디로 북 왕국의 상황은 끊임없는 왕위쟁탈전의 연속이었습니다.
반면 남 왕국은 20명의 왕이 345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북 왕국과 비교하면 135년을 더 지속한 것입니다. 한 왕의 평균 통치 기간은 17년이었습니다. 9개의 왕조가 북 왕국을 통치한 것과 비교하면 남 왕국은 오직 다윗 왕조가 이 기간 전체를 다스렸습니다. 북 왕국의 왕들은 한결같이 악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남 왕국에서는 총 8명의 왕들이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남 왕국의 왕들 가운데 좋은 평가를 받은 왕들은 아사, 여호사밧, 요아스, 아마시야, 아사랴, 요담, 히스기야, 요시야입니다. 그 중에 6명의 왕들은 다윗의 길로 행했던 나름대로 선한 왕이었지만 산당을 제거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와 요시야는 산당까지 제거하여 유다 역사에 남는 훌륭한 왕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처음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될 때 북 왕국은 12지파 가운데 10지파를 차지하였습니다. 반면에 남 왕국은 겨우 2개의 지파만 차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시작과 많이 달랐습니다. 남 왕국은 북 왕국보다 훨씬 더 오래 왕조를 지속했고, 선한 왕들을 상대적으로 많이 배출했습니다. 이것은 결국 왕조의 지속이 여호와 하나님께 달렸다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아무튼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는 약간의 연대차를 두고 둘 다 멸망하고 맙니다. 북 이스라엘은 BC 722년에 아시리아에게 멸망당했고, 남 유다는 BC 586년에 바벨론에게 멸망당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중에서 남 유다가 멸망하는 모습을 다루고 있습니다.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 왕 제 9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왔습니다.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 성 주위에 진을 치고 토성을 쌓았습니다. 그 상태로 예루살렘은 무려 18개월 동안 포위된 채 지냈습니다. 바벨론의 포위가 길어지자 예루살렘 성내에는 곧 양식이 떨어졌고, 곧 심각한 기근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예루살렘 성벽이 파괴되기 시작하자 시드기야 왕은 도성 수비대원들과 함께 도망하여 아라바 길로 갔습니다. 아마도 시드기야 왕은 요단강을 건너 반 바벨론 동맹 회원국들인 에돔이나 모압, 혹은 암몬으로 몸을 피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시드기야 왕은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여리고 평지에서 바벨론 군대에게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왕이 체포되자 왕의 모든 군대는 왕을 버리고 흩어져 버렸습니다. 바벨론의 군사들은 시드기야를 체포하여 바벨론 군대의 본부 립나에 있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끌고 갔습니다. 시드기야는 그 곳에서 비참한 꼴을 당합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시드기야의 눈앞에서 그 아들들을 죽이고 시드기야의 눈을 빼고 놋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이 뚫린 지 한 달쯤 지나서 바벨론 왕의 신복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그가 이끄는 군대는 왕궁은 물론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살라 버렸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성 중에 남아 있는 백성과 바벨론 왕에게 항복한 자들과 무리 중 남은 자들을 모두 사로잡아 갔습니다. 대신 비천한 자들만 남아서 포도원을 관리하고 농사를 짓게 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을 유다에 남겨둔 이유는 포도와 농작물을 생산하여 바벨론으로 보내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바베론 사람들은 성전의 모든 기물들을 약탈하여 바벨론으로 가져갑니다. 이로써 남 유다 왕국은 비참하게 멸망당하고 맙니다. 솔로몬이 다스리던 화려한 시절로 시작된 열왕기서는 이렇게 비참하게 멸망하는 모습으로 끝을 맺습니다.
2. 열왕기상하를 기록한 이유
이제 역사가들이 열왕기상하를 기록한 이유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열왕기상하는 바베론 포로지에서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북 왕국과 남 유다가 모두 멸망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우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특히 남 유다가 멸망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깊은 절망에 빠지게 만드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남 유다는 다윗언약을 계승한 다윗왕조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윗과 언약을 맺으면서 그의 왕조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다윗 왕조가 막을 내렸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상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 포로지에서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 왕들의 역사인 열왕기상하를 기록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왕기상하를 기록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열왕기상하를 기록한 첫 번째 이유는 자신들이 멸망한 이유를 분석하기 위해서입니다. 포로지의 역사가들은 자기 나라가 멸망한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 왕들의 역사를 하나하나 기록하며 분석하였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하여 그들은 곧 자기 나라가 멸망한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예언자들을 통하여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우상숭배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상하를 기록한 역사가들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 왕들에 대해 기록하면서 반복적으로 그들이 악을 행했다는 사실을 기록하였습니다. 실제로 당시 왕들은 대부분 우상을 숭배하는 악을 행했습니다. 정치인들과 종교인들이 결탁하여 우상을 숭배하고, 그 우상숭배를 백성들을 통제하는 도구로 활용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북 이스라엘의 초대 왕 여로보암은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나라를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에 대해 관대한 평가를 내리지 않습니다. 열왕기상 13:33-34을 같이 보겠습니다. “33.여로보암이 이 일 후에도 그의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아니하고 다시 일반 백성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되 누구든지 자원하면 그 사람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았으므로 34.이 일이 여로보암 집에 죄가 되어 그 집이 땅 위에서 끊어져 멸망하게 되니라” 비록 여로보암이 부강한 나라를 만들었을지라도 성경은 아주 냉정하게 그를 평가합니다. 여로보암이 그의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반 백성을 제사장으로 삼았고, 그 일이 여호와께 죄가 되어 그 집이 땅에서 끊어져 멸망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런 사실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군사력이 약해서 나라가 멸망한 것이 아니고 우상숭배를 금지한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서 멸망했다는 사실을 기록하여 남긴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열왕기상하를 기록한 두 번째 이유는 포로가 되어 절망에 빠진 백성들에게 미래적 희망을 제시하기 위한 것입니다. 당시 유다 백성들의 절망감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 아래 영구적으로 보존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다윗 왕조가 무너진 사건은 유다 백성들을 깊은 절망에 빠트렸습니다. 또한 당시 유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포로 생활이 언제 끝날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였습니다. 사실 금방 나라가 회복되어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열왕기상하를 기록한 역사가들은 그렇게 절망에 빠진 자기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기를 원했습니다.
열왕기하의 마지막 장인 25장 끝부분에는 유다 백성들이 희망을 품을만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왕기하 25:27-30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27.유다의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 지 삼십칠 년 곧 바벨론의 왕 에윌므로닥이 즉위한 원년 십이월 그 달 이십칠일에 유다의 왕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놓아 그 머리를 들게 하고 28.그에게 좋게 말하고 그의 지위를 바벨론에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왕의 지위보다 높이고 29.그 죄수의 의복을 벗게 하고 그의 일평생에 항상 왕의 앞에서 양식을 먹게 하였고 30.그가 쓸 것은 날마다 왕에게서 받는 양이 있어서 종신토록 끊이지 아니하였더라”
유다가 멸망한 후 이제 유다에는 정부도 없이 대혼란에 빠져버렸습니다. 그 다음에 열왕기하는 갑자기 바벨론으로 무대를 이동합니다. 바벨론의 새 왕은 감옥에 갇혀 있던 여호야긴 왕을 석방시켜서 왕궁으로 그 거처를 옮겨주었습니다. 그 곳에서 여호야긴은 상당한 수준의 자유를 누리며 바벨론의 다른 왕들보다 더욱 높은 지위를 누립니다. 이 사건은 절망에 빠진 유다 백성들에게 한 줄기 희망의 빛을 주고 있습니다. 여호야긴은 다윗의 후손입니다. 완전히 멸망한 줄 알았던 다윗의 후손이 감옥에서 석방되어 자유를 얻었습니다. 게다가 다른 왕들보다 더 높은 지위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유다의 회복을 암시하는 사건입니다. 다윗 왕조의 복원을 암시하는 사건입니다. 감옥에 갇혔던 여호야긴이 석방되어 다시 지위를 회복한 것처럼 장차 유다도 이 포로지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그 날이 되면 다윗의 왕조를 영원히 보존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헛된 말이 아니라는 사실이 증명될 것입니다. 지금은 작은 불씨마저도 꺼진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당신의 약속을 지킬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결코 마지막이 아닙니다. 희망은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열왕기상하는 바로 그렇게 절망에 빠진 유다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기록한 것입니다.
3. 성전 파괴의 의미
이제 이스라엘 역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의 의미에 대해 짚어보겠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전은 결코 무너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성전은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신 거룩하게 구별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 곳에 임재해 계신 한 성전은 결코 멸망할 수 없는 완전히 거룩하게 구별된 장소입니다. 구약시대에 제사장들은 죄가 있는 상태로 성전에 들어가면 죽는다고 생각하여 철저하게 자신을 정결하게 한 후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일반 백성들은 성전에서 가장 거룩한 공간인 성소와 지성소에는 감히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부정한 자가 거룩한 곳에 들어가면 죽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의 이방인 군대들은 전혀 두려움 없이 성전에 들어가 마음대로 파괴하고 약탈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그 상황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요? 어떻게 거룩하게 구별된 성전이 이토록 무기력할 수 있을까요? 포로기 선지자들은 이 문제를 두고 씨름하였습니다. 선지자 에스겔도 그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에스겔도 유다가 멸망할 때 포로가 되어 바벨론에 끌려갔습니다. 어느 날 에스겔은 환상 중에 놀라운 광경을 목격합니다. 우리 에스겔 9:3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 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에스겔이 환상 중에 보니 그룹에 머물러 있던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으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룹이란 천사들을 가리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가장 거룩한 곳이 지성소입니다. 그 지성소에는 법궤가 있는데 그 법궤를 덮는 덮개를 속죄소라고 합니다. 그 속죄소 위에는 천사들이 있습니다. 속죄소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위에 있던 하나님의 영광이 그 지성소를 떠나 성전 문지방까지 이동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지성소를 떠난 하나님의 영광은 성전의 동쪽 문으로 이동하였다가 결국 예루살렘 동편 산 위에 머물렀습니다. 에스겔 11:23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읍 가운데에서부터 올라가 성읍 동쪽 산에 머무르고” 무슨 말입니까?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버렸다는 말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떠난 성전은 한낱 돌로 지어진 건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방인들이 자유롭게 약탈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에스겔은 새 성전이 완공된 후에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환상 가운데 목격하게 됩니다. 우리 에스겔 43:4-5을 보겠습니다. “4.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가고 5.영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더라” 에스겔이 환상 중에 보니 다시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한 것입니다.
이런 일련의 환상들을 통해 에스겔을 비롯한 바벨론 포로기 선지자들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눈에 보이는 성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에스겔은 바퀴가 달린 이동식 성전의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이제 우리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성전에만 매이는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온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바벨론에서도 예배받으실 수 있습니다. 비록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졌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바벨론 포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깨닫게 된 중요한 신학적 성숙입니다. 이런 신학적 사상은 나중에 예수님의 성육신으로 이어집니다. 우리 요한복음 1:14을 같이 보겠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보고 사도 요한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고백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영광이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께 임했다는 뜻입니다. 비록 예루살렘 성전은 멸망했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이제 예수님께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4. 열왕기상하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결국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제 우리도 열왕기상하를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첫째,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살라
열왕기에 기록된 왕들에 대한 평가 기준은 단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북 왕국의 여로보암이나 아합은 나라의 경제를 비교적 안정적으로 이끌었던 왕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이 악을 행했다고 냉혹하게 비판합니다. 또한 결과적으로 그런 경제적 번영이 나라의 안전을 지켜주지도 못했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중에 하나님 앞에 갔을 때 우리가 무엇으로 평가받겠습니까? 이 땅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했는가를 기준으로 평가받겠습니까? 이 땅에서 얼마나 좋은 학위를 가졌는가로 평가받겠습니까? 이 땅에서 어떤 지위에 있었는가로 평가받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장차 우리가 평가받을 기준은 단 한 가지일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신실한 삶을 살았는가?”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았는가, 하는 것이 유일한 판단기준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적 기준에 따라 살아가지 말고 하나님께서 평가하시는 기준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를 보면 매우 의미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일곱 교회 가운데는 책망만 들은 교회가 두 교회이고, 칭찬만 받은 교회가 두 교회입니다. 나머지 세 교회는 칭찬과 책망을 함께 들었습니다. 책망만 들은 두 교회는 사데교회와 라오디게아교회입니다. 그 두 교회는 매우 부유하고 좋은 여건에 있었지만 타락하여 책망만 듣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세상적으로 내세울 것이 많아도 하나님의 기준에 합하지 못하면 결국 책망만 듣는 것입니다. 반대로 서머나교회와 빌라델비아교회는 칭찬만 들었습니다. 그 두 교회는 경제적으로는 궁핍하고, 영적으로는 핍박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어려운 여건에서 신실한 신앙을 지켜가는 것을 보고 주님께서 칭찬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서머나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부요한 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세상의 기준으로 살지 말고 우리 하나님의 기준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라 – 이스라엘이 멸망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을 때 선지자들은 끊임없이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경고에 귀를 기울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많은 왕들은 경고하는 선지자들을 감옥에 가두고 심지어 죽여버렸습니다. 성경은 크게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축복의 약속이고, 다른 하나는 심판의 경고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축복의 약속을 더 좋아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심판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입니다. 침례요한의 첫 일성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였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제일 먼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회개를 촉구하는 성경의 경고에 늘 귀를 기울이시기를 바랍니다.
3) 언제 어떤 순간이든 결코 소망을 잃지 말라 – 앞에서 간단히 말씀드렸지만 열왕기하는 여호야긴이 석방된 사건으로 끝을 맺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좀 이상하게 생각됩니다. 여호야긴은 그다지 유다의 마지막 왕이 아닙니다. 진작에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서 감옥에 투옥되어 있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열왕기하는 그가 감옥에서 풀려나 왕으로 대접받는 모습으로 마무리합니다. 무엇을 말하려는 것입니까? 어떤 순간이든 소망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호야긴은 다윗 왕조의 남은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가 풀려났고 왕의 지위를 회복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장차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시킬 것에 대한 중요한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소망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아주 영원히 버리지 않습니다. 반드시 당신의 때에 당신의 백성들을 견고하게 세우실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때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의 시간을 보낼 때가 있습니다. 캄캄한 암흑처럼 절망적인 상황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이 다 나를 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결코 영원히 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소망을 잃지 마십시오. 소망을 잃는 순간 모든 것을 다 잃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망을 품고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우리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다윗의 고백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