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박경진
조회수 922
작성일 2017-08-13 19:21:29
죽으면 죽으리이다

 

 

 

죽으면 죽으리이다!(에스더 4:13-17) 

 

1. 서론

 

 오늘은 에스더서를 본문으로 삼아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제가 주일이나 수요일에 에스더서를 본문으로 삼아 설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에스더서는 매우 독특한 책입니다. 우선 이 책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 이유로 에스더서는 이 책이 과연 정경으로 인정받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 오랫동안 다양한 의견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정경에 포함될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에스더서는 다른 책과는 구별된 이 책만의 독특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 독특한 가치가 무엇인지는 잠시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2. 에스더서의 줄거리

 

  먼저 이 책의 내용을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해 이 책의 내용을 잠시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에스더서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먼저 이 책의 시대적 배경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에스더서는 페르시아 제국에서 벌어진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남 유다는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게 멸망당했습니다. 유다가 멸망한 후 유다 백성들 가운데 많은 수가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그 후 바벨론은 신흥 강대국 페르시아에게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은 왕으로 즉위한 이후 유대인 포로들의 귀환을 허락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때 모든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이 아닙니다. 실상은 소수의 유대인만 고국으로 돌아갔고,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여전히 제국 내에 흩어져 살았습니다. 에스더는 당시 페르시아 제국 내에 살던 어린 유대인 소녀였습니다.  

 

 당시 페르시아 제국의 왕은 아하수에로였습니다. 아하수에로라는 이름은 히브리식 이름이고, 세계사에서 나오는 이름은 크세르크세스 1세입니다. 크세르크세스1세, 곧 아하수에로는 초기에 나름대로 탁월한 군사력으로 바벨론과 이집트의 반란을 진압하고 그리스를 침공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 전쟁에 흥미를 잃고 화려한 궁전을 짓고 호화스런 생활을 즐기는 일에 몰두하였습니다. 에스더서는 그 시절에 벌어졌던 사건을 다룹니다. 아하수에로는 왕으로 즉위한 지 3년이 되던 해에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잔치는 무려 180일 동안이나 진행되었습니다. 한참 잔치를 즐기다가 아하수에로 왕은 왕후 와스디를 잔치석상으로 불렀습니다. 왕후의 미모를 자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와스디는 왕의 명령을 거부합니다. 화가 난 왕은 와스디를 폐위하고 새로운 왕후를 찾게 됩니다. 그 때 새로운 왕후 선발대회에서 뽑혀 왕후가 된 인물이 바로 이 책의 주인공인 에스더입니다. 에스더는 포로로 잡혀온 유대인의 딸이었습니다.  

 

 에스더서에 나오는 또 다른 중요한 인물은 모르드개입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의 사촌 오빠였습니다. 에스더의 부모가 죽은 후 모르드개는 에스더를 딸처럼 양육하였습니다. 사촌 오빠라고 하지만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났던 것 같습니다. 에스더는 모르드개의 말을 부모의 말처럼 여기고 복종하며 성장하였습니다. 어느 날 아하수에로 왕의 내시 두 사람이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는데, 모르드개가 그 음모를 알고 왕후 에스더에게 말하여 왕의 목숨을 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은 궁중일기에 기록됩니다.

 

  한편 모르드개를 아주 싫어한 페르시아의 최고위관리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하만입니다. 당시 하만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 듯하였습니다. 하만이 지나갈 때마다 대궐 문에 있는 신하들은 꿇어 절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절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하만은 이런 모르드개가 못마땅하여 그를 죽이려고 하다가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르드개와 같은 민족인 유대인 전체를 몰살하려는 잔인한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당시 아하수에로 왕은 대부분의 정사를 하만에게 다 맡겨놓고 잔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 틈을 이용하여 하만은 유대인들이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하여 유대인 몰살계획을 허락받습니다. 이 명령이 반포되자 유대인 사회는 큰 충격에 빠집니다.  

 

 모르드개는 이 소식을 듣고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대성통곡합니다. 에스더는 모르드개에게 베옷을 벗고 갈아입으라고 새로운 의복을 보냈지만 모르드개는 이를 거부합니다. 에스더가 그 연유를 물었을 때 모르드개는 하만의 무서운 계략을 에스더에게 전합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왕에게 나아가 이 음모를 전하고 유대 민족을 구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처음에 에스더는 왕의 허락이 없이는 왕후라도 함부로 왕에게 나아갈 수 없는 법도를 말하며 모르드개의 요청을 거부합니다. 그러자 모르드개는 단호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왕궁에 있으니 너만 홀로 목숨을 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네가 왕후가 된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모르드개의 말을 듣고 에스더는 이렇게 회답합니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게 하십시오.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이제 에스더는 자기 민족을 살리기 위한 노력을 기울입니다. 에스더는 왕후의 예복을 입고 어전 맞은편에 섭니다. 왕은 왕후의 모습이 사랑스러워 왕후를 불렀습니다. 왕은 왕후 에스더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냐?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노라” 에스더는 왕을 잔치에 초청하고 싶으니 하만과 함께 와달라고 요청합니다. 소원을 말하라는 왕의 말을 듣고도 에스더는 다음날에도 또 잔치에 와 달라고만 요청합니다. 신하 가운데는 자신만 왕후의 잔치에 초청받은 것을 알고 하만은 기뻐하며 대궐을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또 모르드개를 만나고 마음이 상하여 모르드개를 죽일 음모를 꾸밉니다. 높은 나무를 준비하여 그 나무에 모르드개를 달아 죽일 음모를 꾸민 것입니다.

 

 그 날 밤 왕은 잠이 오지 않아 역대 일기를 읽게 합니다. 그 일기에는 자신을 암살하려던 내시들의 음모를 모르드개가 알고 구해 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왕은 그 자리에서 그렇게 큰 공헌을 세운 모르드개에게 무슨 상을 내렸는지 물어봅니다. 신하들은 아무런 관직도 하사하지 않았다고 답합니다. 왕은 하만을 불러 자신이 존귀하게 하고자 하는 자를 어떻게 대우하면 좋을지 묻습니다. 하만은 자신을 존귀하게 하려는 것인 줄 알고 왕복을 입히고 왕이 타는 말에 태워 성중 거리고 다니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합니다. 요즘으로 하면 대통령이 타는 차에 태워 카퍼레이드를 하는 것과 유사할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왕은 모르드개에게 그렇게 해 주라고 합니다.

 

 다음 날 에스더는 왕과 하만을 다시 초청했습니다. 기분이 좋아진 왕은 다시 에스더에게 소원을 말하라고 합니다. 그 자리에서 에스더는 자기 동족을 말살하려는 음모가 벌어지고 있음을 왕에게 아룁니다. 분노한 왕은 누가 감히 그런 일을 꾸몄느냐고 물었고, 에스더는 하만이라고 답합니다. 분노한 왕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당황한 하만은 에스더의 의자에 엎드려 자기를 살려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마치 하만이 에스더를 강간하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분노한 왕은 그 자리에서 하만의 처형을 명령했고, 결국 모르드개를 매달려던 나무에 하만이 매달려 죽고 말았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하만에게 주었던 반지를 빼어 모르드개에게 줍니다.

 

 그러나 여전히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들을 죽이고 재산을 탈취하라는 명령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왕이 한 번 왕의 반지로 인친 조서는 왕이라고 해도 취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하수에로 왕은 유대인들이 스스로 무장하고 대적들을 죽여도 좋다는 새로운 조서를 내립니다. 유대인들이 오히려 자신들의 대적에게 원수를 갚을 기회가 온 것입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도륙을 당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원수들을 도륙하고 진멸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날은 유대인들에게 축제의 날이 되었습니다. 에스더 9:22은 이 날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달 이 날에 유다인들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하매”

 

  유대인들은 이 날을 기념하여 부림절이라는 절기로 지킵니다. ‘부림절’이라는 말은 ‘부르’라는 단어에서 나온 말입니다. ‘부르’는 주사위와 같은 것으로 제비뽑기에 사용된 것입니다. 하만은 유대인을 진멸하기 위해 주사위를 던져 운명의 날을 정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운명을 바꾸셨습니다. 유대인의 대적들이 의도한 운명대로 학살당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부르’의 복수형인 부림절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운명을 거부하여 운명이 역전된 날이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부림절을 지킵니다. 부림절 의식에는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부림절 의식에서 하만의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회중은 큰 소리로 환호하고 발을 구르는 반응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또한 축제 기간에는 ‘하만의 모자’라고 부르는 삼각형 모양의 케이크를 먹습니다. 비록 구약성경에서 지키도록 명령한 공식적인 절기는 아니지만 이 부림절은 어떤 다른 절기보다 현대의 유대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절기입니다.

 

 3. 에스더서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1) 하나님은 주변부의 사람들도 사랑하신다. - 에스더서는 유대인 포로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이후에 여전히 페르시아에 남아있던 유대인들에 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일본의 재일교포, 중국의 조선족, 혹은 러시아의 고려인에 관한 기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모든 초점은 포로지에서 귀환한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다음 주부터 두 주간에 걸쳐 다룰 느헤미야는 바로 귀환한 이후 예루살렘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 전한 학개서는 포로지에서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는 내용을 다루고, 다음 주에 전할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하는 내용을 다룹니다. 그런데 에스더서는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포로지에 남은 유대인들에 관한 내용을 다룹니다.

 

  사실 이 사람들은 철저히 주변부로 밀려난 사람들입니다.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타국에서 사는 것도 서러운데 이렇게 자신들을 몰살하려는 음모까지 벌어졌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서럽고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자신들의 모국인 유대 땅에서는 오로지 예루살렘을 새롭게 재건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자기 동포들이 집단으로 몰살당하게 되었지만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바로 그런 순간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극적으로 목숨을 구하는 내용이 바로 에스더서의 내용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역사의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만 돌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은 중심부에서 밀려나 주변부에서 살고 있는 비주류의 사람들도 돌보십니다. 소외당한 자들, 버림 받은 자들의 슬픔을 아시고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시는 분입니다.

 

  2) 하나님은 보이지 않아도 역사하시는 분이다. - 에스더서의 특징은 하나님의 이름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에스더서는 정경에 포함되어서는 안 되는 책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다른 관점으로 보면 그것이 에스더서의 독특한 가치이기도 합니다. 사실 하나님은 본래 우리 눈에 보이는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이 일하시는 모습은 우리의 눈에 띄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살아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에스더서를 읽다보면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에스더서의 독특한 가치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할 수 있는 책이 바로 에스더서입니다.

 

  3) 하나님은 믿음의 결단을 사용하신다. - 에스더서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결단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사용하신 분은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믿음의 결단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내 노력과 결단을 배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손을 사용하지 않고 직접 일하실 때도 있습니다. 이집트인들에게 열 가지 재앙을 내리고, 홍해를 가르고, 만나와 물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하신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정복전쟁을 벌이고, 포로지 이후에 성전과 성벽을 건축하는 일 등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용하여 일하신 사례들입니다. 하나님은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결단을 사용하여 유대인들을 큰 위기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오늘날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복음이 제한된 지역에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꿈이나 환상을 통해 한 영혼을 구원하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하나님은 잃어버린 영혼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를 통하여 구원하십니다.

 

4. 에스더서를 어떻게 오늘 우리에게 적용할 것인가?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살던 사회는 유대인들에 대해 철저히 적대적인 사회였습니다.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삶은 그런 적대적인 사회에서 과연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해 좋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물론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는 그 시대처럼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완전히 적대적인 사회는 아닙니다. 최소한 우리 사회에서 누가 우리를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죽이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 사회가 점점 더 기독교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 세대는 이런 세상의 분위기를 심각하게 감지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 젊은 세대들은 이런 분위기를 깊이 체감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어느 미션 스쿨에서 교수님이 대학교 1학년 신입생들의 종교를 물었다고 합니다. 놀라웠던 것은 수십 명의 학생이 앉아 있는데 그 중에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손을 든 학생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명색이 전통 있는 미션 스쿨에서 이 무슨 일인가 싶어서 정말 기독교인이 아무도 없냐고 물었더니 한 명이 살짝 손을 들었다고 합니다. 수업이 끝난 후 교수님은 그 학생에게 왜 그렇게 자신 없는 태도로 손을 들었냐고 물었더니 요즘 대학생들 사이에서 기독교인이라고 하면 별로 인식이 안 좋아서 그랬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물론 그 수업에서만 벌어진 조금은 특이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전달하는 과정에서 약간 과장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 사회가 갈수록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좀 더 분명하게 말하면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우리의 믿음을 증거하며 살 수 있을까요? 에스더서에 나오는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이런 면에서 우리에게 좋은 모델이 됩니다. 이제 에스더서를 살펴보면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어느 날 아하수에로 왕은 신하 가운데 한 명인 하만을 가장 높은 위치에 올리고 모든 신하들로 하여금 그에게 꿇어 절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이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왜 모르드개는 그 명령을 거부했을까요? 유대인들은 사람을 하나님처럼 놓이는 것에 대해 극단적인 거부반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 이 때도 모르드개는 하만을 지나치게 놓이는 것에 반감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그로 하여금 왕의 명령을 거부하게 만들었습니다. 모르드개의 입장에서 이것은 자기 나름대로 신앙을 지키는 한 방식이었습니다. 물론 모르드개는 그 순간 하나님의 이름을 들면서 그 명령을 거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의 이면에는 그런 신앙적 결단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인 사회가 되면 일상적으로 신앙적 가치를 거스르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런 순간에 잘 분별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절하지 않는 모르드개를 보고 분노한 하만은 이 기회에 유대인들을 몰살시킬 계획을 세우고 왕의 승인을 받아냅니다. 당시 아하수에로 왕은 잔치에 취해 거의 정사를 살피지 않고 모든 일을 하만에게 위임한 상태였습니다. 왕의 승인이 떨어지자 하만은 지체 없이 제국 내에 유대인을 죽이라는 조서를 붙입니다. 에스더 4:1-3을 같이 보겠습니다. “1.모르드개가 이 모든 일을 알고 자기의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성중에 나가서 대성 통곡하며 2.대궐 문 앞까지 이르렀으니 굵은 베 옷을 입은 자는 대궐 문에 들어가지 못함이라 3.왕의 명령과 조서가 각 지방에 이르매 유다인이 크게 애통하여 금식하며 울며 부르짖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에 누운 자가 무수하더라” 하만의 모략으로 유대인을 몰살하라는 왕의 명령이 제국 전역에 반포되자 모르드개는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통곡합니다. 모르드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른 유대인들도 비슷한 모습으로 금식합니다. 비록 기도했다는 표현이 나오지 않지만 이것은 금식하며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비록 낯선 타국에 살기에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예배드릴 수는 없지만 그들은 하늘의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모르드개는 기도만 하고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모르드개는 즉시 이 상황을 왕후 에스더에게 알렸습니다. 그리고 왕에게 나아가 유대민족을 구원해 달라고 간청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왕에게 부름 받기 전에 왕에게 나아가면 왕후라 할지라도 죽음을 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모르드개의 요청을 완곡히 거절합니다. 그 때 모르드개가 의미심장한 말을 전합니다. 에스더 4:13-14을 같이 보겠습니다. “13.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14.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모르드개가 뭐라고 합니까? “네가 왕후라고 해서 너만 홀로 목숨을 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네가 잠잠히 있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너와 네 아버지의 집은 멸망할 것이다. 네가 왕후가 된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다른 데로 말미암아 구원 얻는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말입니다. 네가 나서지 않으면 하나님은 다른 방도로 우리를 구원할 것이고 너는 멸망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네가 왕후가 된 것은 이 일을 위해서일 수 있으니 한 번 나서보라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듣고 에스더는 결단을 내리고 이렇게 답합니다. 에스더 4:15-16을 같이 읽겠습니다. “15.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회답하여 이르되 16.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에스더는 모르드개에게 수산에 있는 유대인을 다 모으고 자신을 위해 금식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말고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스더는 위대한 고백을 남깁니다. “나도 시녀와 더불어 금식한 후에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에스더는 민족을 살리는 이 위대한 일을 위해 죽기를 각오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에스더는 잔치를 열어 왕과 하만을 초청하여 왕의 마음을 즐겁게 합니다. 그 날 밤 왕은 잠을 못 이루다가 모르드개가 자신을 암살 위기에서 구해준 중궁 일기를 읽게 됩니다. 왕은 즉시 신하를 불러 모르드개에게 어떤 상을 내렸는지 묻습니다. 아무런 상도 내리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왕은 하만을 불러서 왕이 존귀하게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묻습니다. 하만은 그 사람이 자신인 줄 알고 왕복을 입혀 왕이 타는 말을 타고 퍼레이드를 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왕은 즉시 모르드개에게 그렇게 해 주라고 지시합니다. 다음 날 에스더는 또 왕을 초청하여 잔치를 엽니다. 왕의 마음이 즐거워졌을 때 에스더는 하만이 꾸민 유대인 몰살 계획을 아뢰면서 유대인들을 구원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결국 크게 노한 왕은 하만을 처형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문제가 남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왕의 조서는 왕이라고 해도 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왕은 유대인들이 스스로 무장하고 저항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조서를 내려서 유대인들을 구원합니다.

 

 에스라와 모르드개는 하나님의 이름조차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배어 있었습니다. 모르드개는 사람을 하나님처럼 높이는 것을 거부하여 하만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에 충실하다가 왕을 향한 암살 시도를 간파하여 왕을 구하기도 하였습니다. 자기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는 에스더를 통해 민족의 구원을 요청하기도 하였습니다. 에스더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목숨을 걸고 왕에게 나서기를 두려워하였지만 나중에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를 가지고 왕에게 나아가 결국 유대 민족을 구원하였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이름조차 말하지 않았지만 이들의 행동은 철저히 야훼 신앙에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믿음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았습니까? 에스더 8:17을 보겠습니다. “왕의 어명이 이르는 각 지방, 각 읍에서 유다인들이 즐기고 기뻐하여 잔치를 베풀고 그 날을 명절로 삼으니 본토 백성이 유다인을 두려워하여 유다인 되는 자가 많더라” 여기서 유다인 되는 자가 많았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그 말은 유대교로 개종하는 자가 많았다는 말입니다.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하나님의 이름조차 말한 적이 없지만 이들의 믿음의 행동은 이방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결국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놀라운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사회는 지금 갈수록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커져가고 있습니다. 부인하고 싶지만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런 사회에서는 말로 우리의 신앙을 증거하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아니 때로는 말을 하면 할수록 더욱 부정적인 인식이 확산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회에서 우리의 신앙을 증언하는 길은 우리의 삶으로 보여주는 것밖에 없습니다. 에스더와 모르드개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굳이 거명하지 않고도 우리의 신앙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니 오히려 그런 증인의 삶이 더욱 강력한 복음증거의 수단이 될 것입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회피할 수 없는 우리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어떻게 이런 적대적인 환경에 굴하지 않고 믿음을 지킬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운명에 굴하는 대신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자기 백성들을 지키시고 돌보신다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승리를 경험했습니다. 우리 새누리교회의 설립자이신 안이숙 사모님도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펼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지만 결국 석방되어 그 위대한 승리를 일평생 간증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이런 믿음이 있으면 언제나 이런 드라마틱한 승리를 맛볼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역사는 우리에게 항상 이런 드라마틱한 승리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안이숙 사모님은 광복과 함께 석방되셨지만 함께 감옥에 갇혔던 박관준 장로님은 해방되기 몇 달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모두가 드라마틱한 구원을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한결같이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죽음 직전에 살아나는 기적적인 구원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도 역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 가운데 죽어갔습니다. 그들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라는 우리 주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죽음의 자리에서도 위대한 승리를 확신하며 진리를 따르는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삶이 결국 로마를 뒤집어 놓았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삶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를 갖고, 죽어도 살 것이라는 소망을 품고 죽는 날까지 진리를 따르는 삶으로 우리의 신앙을 증거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세상이 점점 기독교인들을 싫어한다고 해서 낙심하지 마십시오. 이제야말로 진짜 신앙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그런 시대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삶으로 보여주는 신앙만이 참 신앙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전 존재를 다해 참 신앙인의 길을 걷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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