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박경진
조회수 635
작성일 2017-08-29 15:35:21
중보기도

 

중보기도(느헤미야 1:1-11) 

 

서론 - 중보기도에 대한 논란과 정리 

 

  요즘 우리 교회에 기도할 제목이 많이 있습니다. 우선 교회적으로는 지난 주에 건축을 하든 건물을 매입하든 자체 건물을 소유하기로 의견을 모았기 때문에 이제 본격적으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하는 상황입니다. 또한 요즘 우리 교회에 환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실 환우들이 많은 것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닙니다. 생로병사는 인간 세상에서 늘 벌어지는 일입니다. 또한 환자가 우리 교회에만 특별히 많은 것도 아닙니다. 어느 교회에나 사람이 많이 있으면 환자도 많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은 다른 때보다 환우들이 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한 분 한 분을 위해 기도하다 보면 아픈 분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외에도 우리 교회 안에 이런저런 기도의 제목들이 있습니다. 중보기도실에 들어가서 기도하다보면 기도할 제목이 참 많다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내가 아닌 타인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중보기도라고 부릅니다. 그런 면에서 지금 우리에게는 중보기도 할 제목들이 참 많습니다.

 

  오늘은 중보기도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선 중보기도라는 용어에 대한 논란을 정리해 드리고 본 내용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흔하게 사용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잘못된 용어이니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중보기도라는 용어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근거로 내세우는 구절은 디모데전서 2:5입니다. 우리 그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이 말씀은 분명히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는 그리스도 예수, 한 분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중보기도자라고 표현하거나 사람이 하는 것을 중보기도라고 표현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디모데전서 2:5의 말씀에 대한 잘못된 적용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5에서 말하는 중보자란 중보기도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사람을 중보하는 속죄의 중보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문맥을 보면 이런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다음 구절인 디모데전서 2:6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여기서 분명히 예수님께서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다고 했습니다. 대속물이란 대속의 제물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디모데전서 2:5에서 말하는 중보자는 기도의 중보자가 아니라 속죄의 중보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속죄의 중보자는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분명히 중보자는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는 중보기도자란 속죄의 중보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중보기도자란 단순히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해 기도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중보기도란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말하는 중보기도자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그 의미는 속죄의 중보자가 아니라 기도의 중보자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타인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중보기도라고 볼 때, 성경에는 중보기도가 많이 나옵니다. 성경에 나오는 중보기도 가운데 대표적인 예는 아브라함이 소돔성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소돔성에 대한 심판을 앞두고 하나님께 소돔성을 용서해 달라고 간절히 탄원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성에 의인 50명이 있으면 용서해 주시겠느냐는 탄원으로 시작하여 10명이 있으면 용서해 주시겠느냐는 탄원까지 여섯 번에 걸쳐 하나님께 간절히 탄원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소돔성에는 의인 열 명이 없었고, 그 결과 소돔성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비록 기도한대로 응답되지는 못했지만 아브라함이 소돔성을 위해 기도한 것은 타인을 위해 기도하는 중보기도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느헤미야의 기도도 역시 중보기도의 좋은 모범입니다. 어느 날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이 큰 환난을 당하고 있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졌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우리 본문 2-3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2.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3.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느헤미야는 형제 가운데 한 명인 하나니를 통해 예루살렘의 형편을 듣게 됩니다. 하나니는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큰 환난과 능욕을 받고 있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에 타버렸다는 소식을 전해 줍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렸지만 이 때는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한 뒤입니다. BC 586년에 유다는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 때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은 모두 무너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가 되어 끌려갔습니다. 느헤미야서는 그 후에 벌어진 포로귀환과 성벽재건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느헤미야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사람의 아들로 이방 땅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관직에 오를 때는 바벨론은 이미 무너지고 페르시아가 패권을 장악했을 때입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왕 때에 술 맡은 관원으로 일했습니다. 술 맡은 관원으로 일하는 중에 예루살렘의 처참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느헤미야 1장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대한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그 땅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제 느헤미야가 중보 기도하는 모습을 통해 중보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중보자가 되려면 먼저 타인의 고통을 보고 울 줄 알아야 합니다. 본문 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이 완전히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앉아서 울었습니다. 그는 수 일 동안 슬퍼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유다가 멸망한 후에 끌려간 포로가 아닙니다. 나이를 따져보면 그는 포로지에서 출생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예루살렘의 소식을 듣고 수일 동안 울면서 슬퍼하고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혹시 나라가 멸망하는 현장을 경험하고 포로로 끌려간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느헤미야는 포로지에서 출생한 2세입니다. 나름대로 어려운 일도 겪었을 수 있지만 포로지 2세로서 고위 관료가 된 사람입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한다면 굳이 그렇게 무너진 나라를 보고 가슴 아파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무너진 예루살렘의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합니다.

 

  우리 예수님도 영적으로 황폐한 예루살렘을 보고 우셨습니다. 다 같이 누가복음 13:34-35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헤롯이 자기를 죽이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탄식하듯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다.” 예수님은 장차 예루살렘이 황폐한 땅이 되어 멸망할 것을 생각하며 깊이 탄식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는 탄식하셨다면 누가복음 19:41-44에서는 실제로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41.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다가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보고 우셨습니다. 평화의 마을 예루살렘이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것을 보시며 우셨습니다. 이제 곧 얼마 안 가서 로마에게 완전히 멸망당할 것을 생각하니 너무 안타까워 우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역시 자신의 동족 유대인들을 생각하면서 심히 고통스러워하며 가슴 아파 하였습니다. 로마서 9:1-3을 같이 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바울은 자신의 동족 유대인들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과 근심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동족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보고 그들이 구원받기 위해서라면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동족의 구원을 원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중보자는 이 땅의 무너진 현실을 보고 가슴 아파하며 울 줄 알아야 합니다. 타인의 고통에 민감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고통당하는 것을 보면 가슴이 아파야 합니다. 누가 고난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마치 내 일처럼 마음이 아파서 눈물이 나야 합니다. 중보자에게는 그런 공감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이의 고통을 보고도 남의 일처럼 그냥 지나치는 사람은 중보자가 될 수 없습니다. 아니 사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한 채 드리는 기도는 참된 중보기도가 될 수가 없습니다. 만약 그런 마음이 없다면, 혹은 부족하다면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중보자의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고통 중에 있는 지체를 보고 울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고난당하는 자를 보고 우는 것, 곧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이 중보자가 되는 첫걸음입니다.

 

  둘째로, 중보자가 되려면 기도의 대상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중보자가 되어 기도하려면 우리가 기도할 대상이 어떤 분인지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본문 5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느헤미야는 기도의 대상을 분명히 알고 기도했습니다. 느헤미야는 먼저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비록 이방제국 페르시아에서 태어나 성장했지만 그는 당시 유대인들이 섬기던 하나님이 누구신지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 분은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방종교에서 주장하는 여러 신들 가운데 한 명이 아닙니다. 그 분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여호와이십니다.

 

  다음에 느헤미야는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비록 이방 땅에서 태어났지만 느헤미야는 하나님이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지키시는 분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언약을 지키는 하나님이 아니라면 무슨 근거로 기도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반드시 언약을 지키겠다고 약속하신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통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를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창 22:17-18). 또한 다윗과 언약을 세우시고 그의 후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대하 21:7). 

 

  그리고 이제 신약시대에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도 응답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7:9-11을 같이 보겠습니다. “9.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이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우리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자녀가 떡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주는 아버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자녀가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와 같이 악한 부모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줍니다. 하물며 우리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중보자가 되려면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구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확신할 때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가 중보기도 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중보자는 타인의 죄를 자신의 죄로 여기는 공동체 정신을 품고 기도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을 자신의 죄로 여기면서 기도합니다. 본문 6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느헤미야는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했다고 고백합니다.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했다고 고백합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느헤미야는 나라가 멸망한 것에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나라가 멸망한 이후 페르시아 땅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치 유다가 멸망한 것이 자신의 죄 때문인 것처럼 통렬히 회개합니다. 이 땅의 무너진 곳을 다시 세우기 위해 중보 기도하는 사람은 그 백성의 악한 죄를 자신의 죄로 여기면서 처절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주위에 무너진 가정이 있습니까? 무너진 학교가 보이십니까? 무너진 교회가 보이시나요? 무너진 직장의 현실을 보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그들을 위해, 그 곳을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긍휼을 구하십시오. 무너진 곳에서 고통당하는 자들을 가슴에 품고 울고 중보하며 기도하십시오. 고린도전서 12:26-27은 이렇게 말합니다. “26.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27.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우리가 한 몸의 지체임을 잊지 마십시오. 중보자가 되려면 다른 사람의 죄를 내 죄처럼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공동체 정신을 회복해야 합니다. 

 

  중보기도자는 그런 공동체 정신을 품고 기도해야 합니다. 지체들의 아픔을 품고 기도하십시오. 우리 공동체의 아픔을 품고 기도하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 일하기를 매우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에스겔 36:36-37을 함께 보겠습니다. “36.너희 사방에 남은 이방 사람이 나 여호와가 무너진 곳을 건축하며 황폐한 자리에 심은 줄을 알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37.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 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 이 말씀에 뭐라고 했습니까?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하나님께서 내가 이루겠다고, 이 일을 행하시겠다고 이미 약속하셨습니다. 그래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루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일하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무너진 곳을 붙잡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황폐한 이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무너진 가정들을 위해 기도하셔야 합니다. 삶이 무너진 지체들을 위해 기도하셔야 합니다. 공동체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실 줄로 믿습니다. 

 

  넷째로, 중보자는 기도를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중보 기도자는 단순히 기도한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이 땅의 무너진 곳을 다시 세우기 위해 기도했다면 이제 구체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본문 11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 느헤미야는 기도의 끝부분에서 이런 기도를 합니다.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여기서 이 사람이 누구를 가리킬까요? 여기서 이 사람은 당시 페르시아의 왕이었던 아닥사스다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왕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해 달라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당시 느헤미야는 왕의 술 관원이었습니다. 당시 술 관원은 왕에게 올릴 술을 검사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왕에 대한 암살 시도가 많을 때이기 때문에 술 관원은 왕과 사적인 대화를 나눌 정도로 왕이 신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지금 왕에게 나아가서 예루살렘 성벽의 복구를 간청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자신이 왕에게 가서 조국을 위해 간청할 때 왕에게 은혜를 입게 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기도를 마치면서 왕에게 찾아가서 자기 백성을 위해 요청하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다만 기도한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기도한대로 구체적인 행동에 옮겼습니다.

 

  사랑하는 새누리2교회 성도 여러분, 지금 이 땅에는 무너진 곳이 참으로 많습니다. 가정, 교회, 학교 등 사회 전반이 다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이 땅이 무너지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타락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 땅이 무너지는 이유는 무너진 곳을 막아설 중보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22:30-31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30.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31.내가 내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 땅의 무너진 곳을 막아서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찾다가 찾지 못하여서 하나님께서 이 땅을 심판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땅에 필요한 것은 바로 그 무너진 곳을 막아서서 기도할 중보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가 느헤미야처럼 그렇게 한 나라를 다시 세우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분은 정말 그런 일을 감당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게 거창하고 막중한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도 최소한 무너진 한 가정을 다시 세우는 일은 할 수 있습니다. 무너진 한 사람의 삶을 다시 세우는 일은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주위를 둘러보면 무너져가는 사람, 무너져가는 가정이 보일 것입니다. 그 영혼, 그 가정이 처한 현실을 생각하며 우십시오. 그 가정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마음을 따라 구체적으로 그 영혼을 돕고 그 가정을 도우십시오. 그 영혼이 당한 일이, 그 가정이 당한 일이 마치 내 일인 것처럼 공동체 정신을 가지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마음을 따라 실제로 도우십시오. 그럴 때 우리 주님께서 그 영혼을, 그 가정을 일으켜 세우실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의 중보기도와 행동을 사용하여 무너져 가는 영혼들과 가정들을 주 안에서 새롭게 하시고 견고하게 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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