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박경진 | ||
조회수 | 825 | ||
작성일 | 2017-10-22 13:14:26 |
은혜 |
은혜(누가복음 19:1-10)
여러분 혹시 제프리 다머(Jeffrey Dahmer)라는 사람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제프리 다머는 아주 끔찍한 범죄자입니다. 그는 열일곱 사람을 살해했습니다. 그 중에서 열한 구의 시체가 그의 아파트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시신들의 팔은 모두 잘려 있었습니다. 그는 살해한 사람들의 인육을 먹기까지 했습니다. 그가 잡혔을 때 미국인들은 인간이 그렇게까지 잔인할 수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맥스 루카도는 “은혜가 내 안으로 들어오다”라는 책에서 제프리 다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까지 말했습니다. “내 낱말 사전에는 ‘나쁘다’라는 단어의 유사어가 204개나 있다. 하지만 그 어떤 낱말도 시체의 머리를 냉장고에 넣어두고 심장을 따로 보관해둔 사람의 행위를 묘사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는 인간이 지닌 잔인성의 한계를 재정립한 인물이다. 그 괴물은 인간행동의 가장 저급한 단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가 끝내 그 밑으로 추락하고 만 것이다.”
맥스 루카도는 제프리 다머를 생각할 때마다 아주 못마땅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물론 그가 흉악한 범죄자이기는 하지만, 맥스 루카도가 제프리 다머에 대해 못마땅한 것은 그의 끔찍한 범죄행위가 아닙니다. 재판과정 역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습니다. 제프리 다머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법정에 앉아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뉘우치는 기색조차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루카도가 못마땅한 것은 재판과정도 아니었습니다. 제프리 다머는 종신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맥스 루카도가 못마땅했던 것은 그런 재판결과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맥스 루카도가 제프리 다머에 대해서 가장 못마땅했던 것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제프리 다머의 회심입니다. 제프리 다머는 후에 동료 죄수에게 살해되었습니다. 그런데 살해되기 몇 달 전에 제프리 다머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죄를 깊이 회개했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악행에 대해서 깊이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섬기겠다고 말했습니다. 세례도 받았습니다. 인생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신앙서적들을 읽기 시작했고 교도소에서 드리는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의 죄는 깨끗이 용서받았습니다. 그의 영혼은 정결하게 되었습니다. 과거는 모두 용서받았습니다. 바로 그 사실이 맥스 루카도를 괴롭혔습니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사람을 열일곱 명이나 죽인 잔인한 살인마에게 은혜가 베풀어진다는 것이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내어 말은 안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꼭 제프리 다머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도저히 용서해서는 안 될 것 같은 죄인을 보면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약간의 죄를 지은 것에 대해서는 용서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자주 죄 용서를 말씀하시기 때문에 적당한 죄가 용서되는 것에 대해서는 쉽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흉악범에 대해서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의 머리에서는 어떤 죄를 지었든지 그리스도의 보혈로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마음에는 다른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수 없이 많은 사람을 죽이고 온갖 잔인한 짓을 일삼은 당신 같은 사람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을 거야! 아니 용서받아서는 안 되지! 당신과 내가 같은 천국에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우리에게는 이런 생각이 남아 있습니다. 아무리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를 용서받았다고 해도 그런 흉악범들이 회개하고 용서받는 것에 대해서는 왠지 마음이 내키지 않습니다.
복음서는 참 이해하기가 어려운 책입니다. 내용 자체가 어렵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특별히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그 은혜로운 행동들은 참으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그 은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면 어쩌면 여러분은 복음서를 피상적으로 읽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생각해 볼까요?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세리보다 바리새인에 대해 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세리가 함께 기도하러 올라갔다가 바리새인보다 세리가 더 의롭다고 인정받았다는 말씀을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그 비유를 오늘날의 버전으로 옮겨보면 어떨까요? 어느 날 경건한 목사님과 늘 남의 돈을 등쳐먹는 유명한 사기꾼이 함께 기도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둘을 보시고 둘 중에 목사님보다 사기꾼이 더 의롭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어느 집에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맏아들은 어렸을 때부터 한 번도 부모의 속을 썩이지 않은 효자였습니다. 학교에서는 늘 우등생이었고, 동네에서는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듣는 효자라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집의 둘째 아들은 형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늘 부모의 속을 썩이더니, 어느 날 아버지가 잘 갖고 있으라고 상속해준 재산을 다 팔아서 술과 여자와 함께 탕진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큰 아들에게는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지 않던 아버지가 부모의 재산을 다 팔아버린 작은 아들이 돌아왔을 때는 체통도 없이 뛰어가서 환영하고 온갖 환대를 다 해주고 잔치까지 열어주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상황이 공평하다고 생각되십니까?
죽기 직전에 용서를 구했다고 해서 아무런 선한 일도 행하지 않은 살인자를 향해 예수님은 낙원을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사실들이 납득이 되십니까? 머리로 이해하는 것 말고 여러분의 가슴으로 정말 납득이 되십니까? 쉽게 납득이 된다면 여러분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아주 특이한 머리구조를 갖고 있거나, 아니면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시고 보여주신 그 은혜는 사실 보통사람에게는 잘 납득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의인들보다 죄인들을 더 가까이 하신 사건은 당시 유대사회에서도 납득하기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도무지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정상적인 사람으로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은 늘 당시 사회에서 미움 받고 멸시받는 사람들과 어울리셨습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세리에 대해서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마태도 세리 출신이고, 삭개오도 세리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서는 세리가 그렇게 나쁜 사람으로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쉽게 말하면 세리는 일제강점기의 친일파 같은 존재입니다. 만약 일제강점기에 친일파들과 주로 어울리면서 그들을 용서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은 그를 정상적인 종교지도자로 생각하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도 역시 우리의 상식과는 잘 맞지 않는 내용입니다. 삭개오가 어떤 사람입니까? 이 사람은 세리 중에서도 가장 높은 사람입니다. 여리고 세무서 서장입니다. 당시 세리들은 동족의 피를 빨아 먹고 사는 아주 흉악한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백성들에게 미움 받고 멸시받으면서 인간이하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부정직한 방법으로 많은 돈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거침없이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이상하게 보였던지 많은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수군거렸습니다. 백성들에게 크게 존경받던 랍비가 하필이면 악랄한 수법으로 돈만 잔뜩 모은 세리장의 집에 들어간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어떤 사람의 집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 사람을 영접하고 받아들인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행동이 얼마나 이상하게 보였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의 이목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그 사람을 향하여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계속하여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의롭지 않게 보이는 사람들을 향하여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가슴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복음서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우리의 상식적인 눈을 하나님의 은혜로 먼저 치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교정해야 합니다. 상식적인 시각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은혜의 의미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말이 무엇인가를 실제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말씀의 의미를 알 수 있을까요?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면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한 번 저와 함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삭개오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삭개오는 자기 죄를 인정했습니다. 본문에는 삭개오가 자기 죄를 인정했다는 말씀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유심히 살펴보면 삭개오가 자기 죄를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오셨을 때, 삭개오는 자신이 토색한 일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삭개오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토색한 것을 갚겠다고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 사실 자체를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종종 자신이 죄인이라는 자각이 추상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입니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으로만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누가 막상 자기 죄를 지적하면 속에서 불끈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 정도면 됐지, 뭘 그리 죄인이라고 해, 나보다 더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여러분이 아직도 이런 마음을 갖고 있다면 여러분은 진심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나오는 세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가슴을 치면서 자기 죄를 인정합니다. 삭개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자신이 토색한 것을 네 배나 갚겠다고 하면서 자기 죄를 철저히 인정합니다. 자신이 그 동안 남의 것을 빼앗으며 살아온 죄인이라는 것을 가슴 깊이 뉘우치며 안타까워합니다. 자신의 본성을 꿰뚫어보는 자만이 이런 고백을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본성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면 내가 어쩔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때 비로소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나오는 세리나, 오늘 본문에 나온 삭개오같은 고백이 터져 나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남의 것을 토색한 죄인입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책, 고백록에서 어린 시절에 이웃집의 배나무에서 배를 딴 것을 고백합니다. 당시 어거스틴은 친구들과 함께 밤늦게까지 놀다가 이웃집의 배나무를 흔들어서 배를 한 아름 땄습니다. 그리고는 그 중에 몇 개만 맛을 보고 나머지는 모두 돼지떼에게 던져주었습니다. 사실 자기 집에는 그 보다 더 맛있는 배가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이 그렇게 한 이유는 단지 그것이 즐거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그 일을 깊이 회개합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오, 하나님, 내 마음을 보소서. 당신은 깊은 저 심연 속에 있는 내 마음을 불쌍히 보시었습니다. 이제 내 마음으로 그 깊은 곳에서 찾고 있는 당신에게 고백합니다. 내가 어떤 뚜렷한 이유 없이 사악한 일을 할 때 거기에서 찾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사악한 일을 할 때 사악한 일을 하도록 한 원인은 바로 사악함 자체 외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더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사랑했습니다.”
현대의 비평가들은 어거스틴이 배를 딴 것 때문에 그토록 괴로워하며 회개하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어거스틴이 강박관념을 갖고 있는 것 같다고 조롱했습니다. 왜 어거스틴은 그 일을 그토록 괴로워했습니까? 단지 도덕적으로만 생각한다면 사실 어거스틴은 그보다 훨씬 더 나쁜 죄를 수없이 저질렀습니다. 그는 동거녀를 두고 사생아를 낳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어거스틴은 배를 따먹은 일을 그토록 괴로워했을까요? 어거스틴은 배를 훔친 사건에서 자신의 죄악 된 본성을 본 것입니다. 자신의 내면에 죄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오히려 성적 쾌락을 즐긴 일은 육신의 약함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배를 훔친 것은 순전히 도둑질 자체를 즐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집 배나무에는 훨씬 좋은 배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자신의 죄악 된 존재 자체를 꿰뚫어 보셔야 합니다. 내 속에 숨어 있는 죄 자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어쩔 수 없는 죄 때문에 괴로워해야 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은 그런 고백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어쩔 수 없는 죄, 그 근원적인 죄를 진솔하게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첫 번째 걸음입니다.
둘째로, 삭개오는 예수님의 은혜를 갈망했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의 은혜를 갈망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고 싶었지만 키가 작고 사람들이 많아서 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 삭개오는 포기하지 않고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습니다. 당시 문화에서 이런 행동은 체면을 구기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에게 그런 체면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체면이 깎이더라도 예수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소원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오시겠다고 했을 때, 뛸 듯이 기뻐했습니다. 6절에 보면 삭개오가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했다고 했습니다. 삭개오는 단지 호기심 때문에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 것이 아닙니다. 삭개오가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 이유가 분명하게 나오지는 않지만 우리는 그 이후에 보인 삭개오의 반응을 통해서 그가 나무 위에 올라간 것이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피터 마샬 (Peter Marshall)의 기도문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저희가 말은 많이 하고 생각은 별로 하지 않은 것을,
하오니, 전심으로 주님을 찾도록,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가 되십시오. 그 은혜가 아니면 살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직 세상에 그것밖에는 소망이 없다는 자세로 갈망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그런 자에게 임했습니다. 그 은혜를 사모하고 갈망하십시오.
셋째로, 삭개오는 회복을 추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영접해 주시자 삭개오는 두 가지 결단을 합니다. 한 가지는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다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다른 사람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삭개오의 이런 결단은 이제 자신의 삶을 바르게 회복하겠다는 뜻입니다. 사실 삭개오의 소유 중에 많은 부분은 본래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거둔 세금을 착복하여 소유를 늘렸습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의 것을 토색한 것은 돌려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방법으로 빼앗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삭개오의 결단은 회복의 결단입니다. 구원은 다른 말로 회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런 인간이 타락하여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선포한 구원은 다른 말로 하면 회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창조되었던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삭개오는 그 동안 하나님과의 관계도 파괴되었고, 이웃과의 관계도 단절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를 외면했습니다. 아니 외면한 정도가 아니라 그를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이웃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사람 같지도 않은 사람의 집에 들어갔다는 사실 때문에 수군거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을 때 제일 먼저 삭개오가 추구한 것이 바로 회복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그 집을 방문하시는 은혜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삭개오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자 그는 무엇보다 먼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원했습니다.
삭개오는 그 동안 살아온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한 번도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늘 자신의 재물을 모으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자기 재산 가운데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내어 놓겠다고 결단합니다. 그것 뿐 아닙니다. 자신이 그 동안 재물을 모은 방식을 생각해 보니 다른 사람들의 것을 빼앗은 것이 많습니다. 온갖 부정직한 방법으로 다른 사람의 재물을 탈취했습니다. 세리장이라는 직책을 이용하여 과도하게 세금을 부과하고 착복한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자신이 다른 사람의 것을 탈취한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실제로는 없겠지만 만약 있다면 하겠다고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있는 사실을 근거로 말하는 것입니다. 삭개오가 이 결단대로 실천했을 때 사실 그에게는 거의 남는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절반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입니다. 남은 절반은 그 동안 토색한 사람들에게 네 배로 갚아주는데 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실제로 삭개오의 재산은 거의 사라질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렇게 하기로 결단합니다.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 참된 구원입니다. 그 동안 삭개오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겠습니까? 돈은 많이 모았지만 동족들에게 지탄을 받으면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할 때 얼마나 그의 마음이 괴로웠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제 삭개오는 주님의 은혜로 자신의 삶을 회복하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삭개오를 향하여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삭개오는 하나님의 은혜로 진정한 구원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자꾸 완전한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결코 완전한 사람이 모인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죄인들이 모여서 이런 변화를 이루어가는 곳입니다. 믿음이란 일종의 회복운동입니다. 구원은 한마디로 회복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완전한 사람들이 가득 찬 곳이 아니라 용서받은 사람들이 가득 찬 곳이어야 합니다. 어떤 신학교 교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 그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교회에는 크게 보면 두 가지 사건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첫째는 구원받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전혀 알지 못하고 살던 자가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 받고 삶이 회복되는 사건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특별한 헌신의 사건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선교사로 헌신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혹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나 재산을 다 포기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교회는 변화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분명히 죄인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는 그 죄인들이 변화되어가는 곳이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삭개오가 많이 있어야 합니다. 비록 과거에는 다른 사람을 등쳐먹고 살았지만 이제는 복음의 능력으로 변화된 삭개오가 많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습니다. 의원은 오직 병든 자에게만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의인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탕자를 돌아오게 하는 것이고 삭개오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렇게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변화되어가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어야 합니다.
강화도에 가면 백년이 넘은 교회가 많이 있습니다. 강화도에 최초로 세워진 교회는 교산교회인데 올해 124주년을 맞았습니다. 강화도에 두 번째로 생긴 교회는 교산교회가 개척한 홍의교회라는 교회입니다. 어느 날 그 마을의 부자인 종순일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는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이 빚을 탕감받은 이야기를 읽고 큰 은혜를 받습니다. 그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겠다고 마음 먹고 자기에게 빚진 소작농들을 모두 불러서 자신에게 진 빚을 모두 탕감해 주겠다고 말합니다. 처음에 소작농들은 종순일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자 종순일은 소작농들에게 차용증서를 모두 가져오라고 해서 난로에 태워버립니다. 그제야 소작농들은 종순일이 베푼 은혜에 감격합니다. 그 후 소작농들은 어떻게 하면 그 은혜에 보답할까 고민하다가 교회에 나가주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회개하고 참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 일로 홍의교회가 크게 부흥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는 예수님의 은혜를 진정으로 경험하면 이런 변화가 일어납니다. 개인의 변화는 한 개인의 변화로 그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변화는 자연스럽게 공동체의 변화로 이어집니다. 종순일의 변화는 홍의교회의 변화로 이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변화된 사람은 이제 자신의 본성을 따라서 사람들을 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내 잘못은 덮어 두고 싶고 다른 사람의 잘못은 드러내고 싶어 합니다. 내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지적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참된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은 그런 본성과는 다른 태도를 갖게 됩니다. 은혜로 변화된 사람들은 먼저 자신의 허물을 보게 됩니다. 자신의 허물을 바라보기 때문에 겸손히 죄 용서를 구하게 되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볼 때도 이해하는 마음으로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이 속한 공동체에는 은혜와 용서가 흘러넘치게 됩니다. 또한 참된 은혜를 경험하게 되면 물질에 대한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전에는 물질을 최대한 많이 쌓아 놓고 혼자서 누리는 것이 제일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 됩니다. 이전에는 자신의 수입을 모두 자기 능력으로 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물질을 하나님께 대출받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물질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하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가 속한 공동체가 점점 더 풍성한 나눔이 있는 사랑의 공동체가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구제하는 이유는 공로를 쌓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타인을 용서하는 이유도 역시 공로를 쌓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푸신 은혜가 너무 감사하여 이제 그 은혜를 베푸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신 주님의 은혜가 감사하여 이제 가진 것을 나누며 사는 자가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내가 지은 그 엄청난 죄를 용서해주신 그 은혜가 너무 감격스러워서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면서 사는 자가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의 삶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바로 이 은혜를 깊이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삭개오가 경험한 이 놀라운 은혜를 깊이 체험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 은혜를 깊이 체험하여 저와 여러분의 삶에 참된 변화가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우리의 변화를 통하여 우리가 속한 곳이 은혜로 충만한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은혜의 원천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