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박경진
조회수 741
작성일 2017-12-31 22:33:37
새 하늘과 새 땅

 

새 하늘과 새 땅(요한계시록 21:1-7)

 

  성경의 첫 책인 창세기와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은 서로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창세기가 하늘과 땅을 창조하는 사건으로 시작한다면 요한계시록은 하늘과 땅, 천지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재창조하는 사건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성경 전체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 인간의 범죄로 타락하자 이를 회복하여 재창조하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구속’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구속’이란 단어는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감옥에 감금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학 용어로 구속(救贖)이란 말은 한문으로 ‘건질 구’와 ‘속바칠 속’으로 구성된 것으로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십자가의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인류를 구원한 사건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경의 주된 내용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이 인간의 죄로 타락하자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 그 타락한 세상을 구속한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그런 구속의 절정, 곧 구속의 완성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은 구속의 완성으로서 재창조되는 천지, 곧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하여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1.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떻게 완성되는가?(1절, 5절)

 

  종말론의 해묵은 논쟁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은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을 대체하는 것인가, 아니면 갱신하는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쉽게 말해서 새 하늘과 새 땅은 현재의 우주 너머 어떤 공간에 현재의 세상을 대신하여 새롭게 마련되는 것인가, 아니면 현재의 세상을 새롭게 갱신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갱신인가? 대체인가?” 하는 질문은 종말론에서 자주 논쟁되는 주제입니다. 사실 이런 문제는 백 퍼센트 확신있게 이것이 옳다, 라고 주장하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이 논쟁이 종말론의 핵심적인 논쟁이라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성경을 통해 어느 정도 유추하거나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 본문 1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이 말씀을 보면 갱신보다는 대체가 맞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5절을 보면 조금 다르게 볼 측면이 있습니다. 우리 5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이 말씀에서는 만물을 새롭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새롭게 한다는 말은 새롭게 만든다는 말이라기보다는 새롭게 갱신한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이 말씀만 보면 이번에는 대체보다는 갱신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1절과 5절 사이에 모순이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이 두 구절의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과연 ‘대체’와 ‘갱신’가운데 어떤 말씀이 옳을까요? 우선 한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논리전개상 뒤의 것이 앞의 것을 보충 설명한다고 보는 것이 맞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5절에 나오는 ‘갱신’이 1절에 나오는 ‘대체’를 보충 설명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는데 그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께서 새롭게 하신 것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새롭게 하신 정도가 워낙 완전하고 완벽해서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져 버린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를 지지하는 또 다른 증거가 있습니다. 1절은 사도 요한이 환상 가운데 본 것을 기록한 것이지만 5절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요한은 완전히 새 것처럼 보았는데 하나님께서 그에 대해 만물을 새롭게 하셨다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대체보다는 갱신의 의미가 더 정확한 것으로 보입니다. 만물이 새로워진 것이 너무 놀라워서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완전히 사라지고 새롭게 되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1절에서 바다도 다시 있지 않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실망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다행히 여기서 바다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바다는 짐승이 올라오는 악의 근원으로 묘사됩니다. 우리 요한계시록 13:1을 같이 읽어볼까요?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 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더라” 그러므로 여기서 “바다도 다시 있지 않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새롭게 하신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악의 근원이 철저히 제거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2. 새 하늘과 새 땅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2절)

 

  이제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과연 새 하늘과 새 땅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우리 2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새 하늘과 새 땅을 본 다음에 사도 요한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새 예루살렘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킬까요? 그 다음에 이어서 나오는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다는 표현에 힌트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신부가 누구입니까? 바로 교회입니다. 에베소서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소개합니다. 따라서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다는 표현은 종말에 완성될 교회가 그만큼 아름답고 영광스럽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새 예루살렘에 대한 설명은 오늘 본문 외에도 네 번이나 더 나옵니다. 때로는 그리스도의 신부, 때로는 거룩한 도시, 때로는 새 예루살렘이라고 각각 다르게 표현되지만 이들은 모두 교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먼저 요한계시록 3:12을 보겠습니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여기서 나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기는 자에게 자신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주시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새 예루살렘의 이름이 영적 전투의 승리자에게 주어질 종말론적 약속으로 등장합니다.

 

  이제 요한계시록 11:1-2을 보겠습니다. “1.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2.성전 바깥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1절에서는 측량하라고 했지만 2절에서 성전 바깥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고 했습니다. 성전 바깥마당을 거룩한 성이라고 부르는데, 이 거룩한 성이 이방인들에게 짓밟힐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양면성을 잘 보여줍니다. 성전 바깥마당이 이방인들에게 짓밟힌다는 말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방인들에게 핍박당할 것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1절에서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하신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의미는 교회는 핍박 중에도 보호받는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이제 요한계시록 19:7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이 말씀에서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했다는 말은 새 예루살렘이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준비를 끝내고 혼인잔치를 치를 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 역시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가리킵니다.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 20:9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버리고” 그 사랑하시는 성, 곧 성도들의 진, 곧 진지를 사탄과 그의 군대가 에워싸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버립니다. 여기서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은 새 예루살렘, 곧 교회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지켜주신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요한계시록에서 새 예루살렘은 항상 교회를 가리킵니다. 다만 그 교회에는 양면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때로는 하늘에 안전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나오고, 때로는 이 땅에서 사탄의 공격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서 교회는 가장 완벽한 그리스도의 신부로 준비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 예루살렘과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떤 관계를 갖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신 이유는 새 예루살렘이라고 표현된 교회가 그것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첫 창조 때에도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누릴 피조세계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좋아하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긴 구속의 과정을 통하여 다듬어진 영광스러운 교회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선물로 주십니다. 결국 새 하늘과 새 땅은 교회를 위한 그 분의 은혜입니다. 은혜의 선물입니다.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표현한 것은 그것이 우리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3.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시는 목적은 무엇인가? (3-7절)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시는 목적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새 예루살렘으로 상징되는 교회와 혼인잔치를 치르시고,  완전한 결합을 이루셨습니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3절입니다. 우리 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3절은 언약의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이제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십니다. 이 구절은 종말에 언약이 최종적으로 성취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6절에서 하나님께서 이루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6절을 같이 볼까요?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하나님은 이루었다고 하십니다. 무엇을 이루었다는 말입니까? 이제 긴 구속의 역사,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셨다는 말입니다. 이제 드디어 구속의 역사를 완성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교회에게 은혜의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구속의 역사를 완성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교회에게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 3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3절에서는 그 목적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인 교회와 함께 계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4절을 보겠습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4절에서는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셔서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은 그런 삶을 살게 해 주시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6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6절에서는 그 목적을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기 위해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준다는 말은 영생의 은총을 값없이 주신다는 말입니다. 

 

  결국 새 하늘과 새 땅을 교회에게 주시는 목적은 주께서 교회와 함께 계시면서 그들에게 영생을 주셔서 다시는 눈물과 고통이 없는 삶을 살게 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본문 7절은 구속의 역사를 완성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신 목적을 가장 분명하게 밝힙니다. 우리 7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그 목적은 바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하나님은 친히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역사를 관통하는 긴 구속의 기간에 걸쳐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준비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셨습니다. 그 목적은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우리와 더불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온전히 교제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 처음과 끝이십니다. 시작하시고 완성하시는 분이십니다. 알파와 오메가는 헬라어 알파벧의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입니다. 따라서 그 말은 우리 하나님은 역사를 시작하시고 끝내시는 역사의 주관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은 당신이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성취하실 하나님이십니다.

 

4. 누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사는가? (7절)

 

  그럼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마지막 질문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게 될까요? 우리 7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7절은 아주 분명하게 이기는 자가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기는 자는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을 가리킬까요? 여기서 이기는 자는 참된 믿음으로 여러 시험을 이기는 자를 가리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시험이 나옵니다. 그런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지지 말고 시험을 이겨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시험을 이겨야 할까요?

 

  첫째로, 우리는 세상과 타협하라는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14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가운데 버가모 교회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버가모 교회를 책망하시면서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발람의 교훈이란 재물의 우상을 섬기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유혹은 재물의 유혹입니다. 오죽하면 주님께서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겠습니까? 그만큼 돈의 유혹이 크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기는 자가 되려면 성도는 돈의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20을 같이 보겠습니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이 말씀은 일곱 교회 가운데 두아디라 교회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두아디라교회에게 네가 이세벨을 용납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여기서 이세벨의 유혹이란 율법폐기론을 가리킵니다. 율법폐기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구약의 율법은 모두 폐기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주장의 결과로 그들은 결국 도덕적 방종에 빠지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기는 자가 되려면 재물의 우상이나 율법폐기론과  같은 잘못된 교훈을 경계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잘못된 교훈들이 교묘하게 교회에 침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탄이 이런 교묘한 논리로 우리를 유혹하는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사탄이 우리를 유혹하는 목적은 우리를 멸망에 빠트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경계심을 가지고 이런 잘못된 교훈의 유혹을 이겨내시길 바랍니다. 시험을 이겨, 말 그대로 이기는 자, 승리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성도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을 의지하려는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3:17을 같이 보겠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이 경고는 일곱 교회 가운데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자신들은 부자라서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너희들이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랑할 것, 의지할 것, 이룬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이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구원은 은혜입니다. 내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능력을 키워서 내 힘과 능력으로 이런 유혹을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나의 약함을 인정하고 나의 죄를 회개하며 성령님의 도우심을 따라야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자기를 의지하고자 하는 유혹, 자기를 신뢰하고자 하는 유혹을 물리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성도는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지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이기는 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성도는 박해를 견뎌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10을 보겠습니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증인으로 살다 보면 박해가 찾아올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정부 차원의 박해를 받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때로 집안에서 박해를 받을 수 있고, 직장에서 박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박해가 찾아올 때 성도는 끝까지 견뎌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난 수요일 사랑하는 박인순 자매를 먼저 떠나보냈습니다. 자매님은 작년 여름부터 약 1년 4개월 동안 암으로 투병하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아직 50세도 안 된 젊은 자매입니다. 자매님도 사랑하는 부모님의 딸이고, 한 남편의 아내이며, 두 아들의 어머니입니다. 3일간 장례를 치르면서 아니 자매가 투병하는 동안에도 우리는 많이 울었습니다. 가족들은 물론이고, 우리 성도들도 함께 많이 울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한다면 참으로 허망하기 이를 데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3일 동안, 아니 지난 1년 4개월 동안 계속 찬송을 부르고 기도했습니다.장례 일정을 진행하면서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예배를 드렸습니다. 비록 헤어짐의 슬픔을 가눌 길은 없지만 우리는 슬퍼하는 동시에 천국의 소망, 부활의 소망을 품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영원의 관점으로 본다면 이 땅의 삶은 사실 잠시잠깐입니다. 비록 이 땅에서 헤어지는 것이 슬프고도 아픈 일이지만 우리는 이 헤어짐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하늘가족이고, 성도는 천국 백성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다시 오심으로 이루어질 그 아름다운 세상을 소망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대로 교회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는 새 예루살렘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종말에 완성될 새 하늘과 새 땅에 사는 자가 되려면 성도는 참된 믿음을 품고 여러 가지 유혹을 이겨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세상을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아주 분명하게 가르쳐줍니다. 이기는 자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속으로 받고 그 안에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더 이상 고통과 눈물이 없는 삶을 살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박인순 자매님은 참으로 신실한 분이었습니다. 늘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성숙한 신앙인격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고통스러운 투병 기간 동안에도 얼마나 예배를 사모했던지 예배에 빠지지 않고 정말 말 그대로 온 힘을 다해, 사력을 다해 주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도 온 힘을 다해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저도 그렇게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참된 믿음으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찾아오는 여러 가지 세상의 유혹을 잘 이기고 궁극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속 받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 곳에서 하늘 아버지와 더불어 이제는 더 이상 눈물과 고통이 없는 영생복락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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