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안진섭 | ||
조회수 | 230 | ||
작성일 | 2004-09-26 00:00:00 |
인간의 3대 욕망 |
2004.9.26 주일낮예배 설교
인간의 3대 욕망 (누가복음 16:14-18) 제가 처음 전도사 생활을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목사는 세 가지를 조심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돈과 명예와 이성이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그 말이 진리라는 것을 자주 경험하곤 합니다. 이 세 가지 유혹이 목회자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줄 수 있는가를 자주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사실 목회자에게만 치명적인 것은 아닙니다. 이 세 가지 욕망은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욕망들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파괴적이고 치명적인 결과를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이 세 가지 욕망을 주의해야 합니다. 인간에게 여러 가지 욕망이 있겠지만 이 세 가지 욕망만큼 보편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존재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선각자들이 이 세 가지의 위험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토마스 아켐피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어 없어질 부를 추구하며 그 안에 소망을 두는 것은 허영이다. 명예를 열망하며 높은 지위에 오르고자 하는 것 또한 허영이다. 육신의 정욕을 좇는 것도 허영이다.” 리챠드 포스터는 “돈, 섹스, 권력”이라는 책에서 이 세 가지 욕망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날에 있어서 긴급히 필요한 일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신실하게 사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실존하고 있는 모든 영역에 해당하는 일이지만 특별히 돈과 섹스와 권력과 관련해서 더욱 긴요한 일이다, 이 주제들보다 더 심오하거나 더 보편적으로 우리에게 느껴지는 문제는 없다. 이 주제들보다 더 불가분리적으로 서로 뒤얽혀 있는 것도 없다. 다른 아무 화제들도 이것들처럼 논쟁을 일으키지는 못한다. 인간의 현실들 가운데 이것들만큼 커다란 축복이나 저주를 가져다주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없다. 이 세 가지 주제들보다 더 탐구되거나 기독교적 응답을 필요로 해온 것은 일찍이 없었다.” 누가복음 16장은 돈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탐욕이 결코 하나님의 나라와 함께 갈 수 없음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은 크게 세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13절은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와 그에 대한 해석을 담고 있습니다. 19-31절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두 비유 사이에 오늘 본문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인간의 3대 욕망을 모두 표현하고 있습니다. 14절에서는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통하여 돈 문제를 언급합니다. 15절에서는 바리새인들의 숨은 동기가 사람 앞에서 높임을 받으려하는 것임을 드러내심으로써 명예욕을 다룹니다. 그리고 18절에서는 이혼문제를 통하여 간음, 곧 성 문제를 다룹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두 비유가 주로 돈에 관련된 문제를 다룬다면 오늘 본문은 돈과 명예와 성 문제를 골고루 다룹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주로 돈 문제를 다루다가 갑자기 명예와 성의 문제까지 함께 다루고 있을까요? 리차드 포스터는 그의 책 “돈, 섹스, 권력”에서 이 세 가지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지적합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이런 사실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돈은 곧 권력입니다. 또 성은 돈과 권력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권력은 또한 “최상의 최음제”라고 불리워집니다. 우리가 굳이 이런 글들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돈과 명예와 이성이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실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주로 돈 문제를 다루시다가 명예와 이성의 문제를 함께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욕망에 대한 가르침은 그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참으로 적절하고 필요한 것입니다. 이제 이 세 가지 욕망을 한 가지씩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돈에 대한 욕망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들려주신 후에 그 비유의 의미를 해석해 주셨습니다. 또한 그 자리에 있던 제자들에게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시면서 강력하게 도전하셨습니다. 그 때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바리새인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비웃었습니다. 14절에 보면 그 이유는 바리새인들이 돈을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리새인들이 돈을 좋아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 말은 단지 돈에 대한 그들의 기호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당시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은 돈을 긍정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부를 하나님의 축복의 표시로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어떤 바리새인들은 자발적으로 가난하게 사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 배경을 생각하면 우리는 이 말씀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은 것의 의미를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만약 오늘날 지극히 가난하게 사는 자가 재물의 위험성을 경고한다면 부자들이 그 말에 귀를 기울이겠습니까? 오히려 비웃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재물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가난하게 사는 사람의 경고를 귀담아 듣겠습니까? 대부분 그런 말을 주의 깊게 듣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주의 깊게 듣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이 바리새인처럼 비웃을 것입니다. 바르게 살지 못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 사람의 넋두리 정도로 생각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문제는 그들이 돈을 지나치게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돈을 사랑하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신학적인 명분을 세웠습니다. 그것이 바로 재물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부유한 것이 하나님의 축복의 증거라고 해야 자신들의 부가 합리화되기 때문에 그들은 그와 같은 번영의 신학을 갖게 된 것입니다. 현재 한국교회도 이 문제에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초창기 한국교회는 번영의 신학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초창기 한국교회는 고난당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가난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당시 목회자들은 대부분 물질을 탐하지 않고 청빈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70년대에 경제부흥과 함께 부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번영의 신학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이제 한국교회는 물질적으로 크게 부유해졌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복음에서 크게 멀어진 채 세속화되어 버린 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강단에서는 온갖 세속적 야망을 부추기는 설교가 선포됩니다. 더 많은 돈을 벌게 해달라는 소원예물이 넘쳐나고, 그런 소원예물을 놓고 축복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런 물질의 복을 구한 적이 거의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물질의 위험성을 자주 경고하셨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것처럼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를 사랑하면 다른 하나를 미워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끊임없이 돈에 대한 탐욕을 품습니다. 돈에 대한 인간의 탐욕은 옛날부터 늘 있었던 것이지만 현대에 와서 그 정도가 더 심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옛날과 달리 지금 우리는 돈이 없으면 거의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돈은 어느덧 우리가 숨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돈 자체에 대해서 정죄하지 않습니다. 돈은 특별히 선할 것도 없고 특별히 악할 것도 없습니다. 돈은 가치중립적인 것입니다. 문제는 돈에 대한 인간의 탐욕입니다. 늘 더 많이 갖기를 원하고 남들과 비교하여 남들보다 더 많이 소유하기를 원하는 인간의 탐욕이 문제인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주제보다도 돈에 대해서 더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돈 문제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갖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연보궤 앞에서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지켜보시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헌금하는 모습을 보고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판단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돈 문제에 대해서 이토록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돈에 관한 인간의 탐욕을 꿰뚫어 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탐욕이 우리의 영혼을 망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거룩한 신학적 주제들 못지않게 자주 돈에 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돈에 대한 탐욕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경고하면서 토마스 머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대사회에서 돈은 성령이 교회에서 차지해야 할 역할을 악마적으로 찬탈해 버렸다.”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 가지의 회심이 필요하다. 가슴의 회심, 정신의 회심, 그리고 돈 지갑의 회심이다.” 그러므로 돈에 대한 욕망을 경계하십시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늘 경계하면서 사십시오. 두 번째 욕망은 명예의 욕망입니다. 다른 말로 권력의 욕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15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바리새인들은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자신들을 의롭게 여겼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을 의롭게 여긴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놀랍게도 자신들이 물질적으로 부유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앞에서 잠시 말씀드렸던 것처럼 바리새인들은 물질적 부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질적으로 부유한 사람은 하나님께 의로운 자로 인정받아서 축복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돈이 자신들의 경건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혀서 바리새인들은 점점 더 사람들의 인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위선자들로 변해갔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이런 모습은 결국 돈과 명예욕이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경건한 자라고 인정받기를 원했던 바리새인들은 날이 갈수록 더욱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의 경건을 드러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들은 정해진 기도시간이 되면 일부러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거리 어귀로 나왔습니다. 그래야 자신들이 기도시간을 잘 지켜서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런 욕망 자체를 죄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욕망이 제대로 통제되지 못하면 시간이 흐르면서 위선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매사에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행동하고 사람들의 좋은 평판을 위해서 사역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가만히 보십시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적인 명예를 추구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온갖 감투를 차지하려고 애를 씁니다. 단지 그 영역이 기독교계로 바뀐 것일 뿐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기독교계에서 명예를 추구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팔아서 자기 이름을 내고 싶어합니다. 명예를 추구하는 것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입니까? 명예라는 것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는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의 근본적인 생각을 파고 들어가 보면 결국 그 뿌리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이 자리잡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그 분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만일 이 사실을 진실로 믿는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시선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더 의식하겠습니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위선의 껍질을 벗기신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어떻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보다 겉모습만을 보는 사람을 더 의식하면서 살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람들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명예욕을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종종 제게 교묘한 명예욕이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제가 별로 명예욕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 자신이 가만히 제 마음을 들여다보면 제가 아주 지능적인 명예욕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제게는 사심이 없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별로 추구하지 않는 겸손하고 순수한 사람이라고 인정받고 싶어하는 교묘한 욕구가 있습니다. 위선 중에서도 고도의 지능적인 위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말로 사람의 인정에 대해서 마음을 비우고 있다면 그런 생각 자체를 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명예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는 것을 보면 제 자신이 얼마나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사람인가를 알게 됩니다. 명예욕이 없는 사람이라고 인정받고 싶어하는 위선적인 명예욕이 제 안에 깊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런 지능적인 명예욕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식한 결과입니다. 살아계시며 내 중심을 살피시는 하나님보다 당장에 눈에 보이는 사람들의 시선을 더 의식하기 때문에 그런 태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명예욕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도 여전히 세상적인 명예를 추구하고 있다면 우리는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을 살아계시며 우리의 중심을 살피시는 전능자가 아니라 단지 우리의 편리를 위해서 우리가 만들어 놓은 우상정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적인 명예를 추구하는 것은 결국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욕망은 이성에 대한 욕망입니다. 다른 말로 성적인 욕망입니다. 본문 16-18절은 문맥과 잘 연결이 안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16절은 이제 율법과 선지자의 시대, 곧 구약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되었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되었고 그 나라를 사모하고 갈망하는 사람들은 그 나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갑자기 이 말씀을 하시는 배경이 무엇입니까? 16장은 전체적으로 재물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생각해 보면 16장은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 땅의 재물에 마음을 두지 말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라는 것이 16장의 메시지입니다.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통해 권고하고 있는 것은 다가오는 미래를 준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실 16장은 이미 시작되었으며 앞으로 더욱 완전하게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라는 권고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 나라를 소망하는 사람으로서 이 땅의 재물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말씀을 하기 위해서 물질의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구약의 모든 율법을 단번에 폐지했다는 의미는 아닌 것입니다. 17절의 말씀은 바로 그런 말씀입니다. 율법의 한 획이라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재해석되어 완성될 것입니다. 18절은 그렇게 재해석되고 완성된 율법의 예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여러 율법의 말씀가운데 간음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간음, 곧 성적 욕망은 돈과 명예와 더불어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 세 가지를 모두 말씀하십니다. 구약의 율법은 제한적으로 이혼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잘 이해하려면 율법의 성격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은 인간의 완악함을 고려하여 그 시대 사람들의 수준에 맞게 주어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율법 가운데 동해복수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라는 구절이 좋은 예입니다. 왜 이런 식의 동해복수법을 율법으로 주셨을까요? 그 이유는 그런 법을 주지 않으면 사람들은 자신이 받은 것보다 더 심한 복수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의 문자에 매이지 말고 율법의 근본정신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율법을 그 근본정신에 따라서 재해석하셨습니다. 18절의 말씀은 이혼에 관한 율법을 예수님께서 재해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이혼을 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혼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단지 더 악한 경우를 막기 위해서 제한적으로 이혼을 허용하셨던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예수님께서 이혼을 강하게 정죄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종종 이혼이 재혼을 목적으로 행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런 이혼은 간음일 뿐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부자들에게는 이혼, 간음, 일부다처제 등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가난한 사람들보다는 부자들에게 이런 문제가 더 심했습니다. 그러므로 물질에 대한 탐욕과 성적인 탐욕은 서로 연결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돈에 대한 탐욕이 많은 자들이 성적인 탐욕을 품고 범죄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성적인 탐욕은 인간을 한 순간에 무너뜨립니다. 성욕 자체는 결코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적절한 방향으로 통제되지 않은 성욕은 엄청난 죄를 짓게 만듭니다. 성적 욕망은 불과 같습니다. 불은 잘 사용되면 참으로 유익한 것입니다. 그러나 통제되지 않은 불은 한 순간에 모든 것을 태워버립니다. 그러므로 성적 욕망에 대해서 자신하지 마십시오. 성적인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의 문제를 마치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적인 범죄에 빠진 사람들이 우리보다 덜 경건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한 순간의 방심이 엄청난 범죄에 빠지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의 경고를 무시하지 마십시오. 앞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이 세 가지 욕망은 서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욕망이 얼마나 깊은 관련이 있는가를 알려면 다윗을 생각해 보면 됩니다. 다윗은 돈과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돈과 권력이 그로 하여금 성적인 범죄에 빠지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비록 이 세 가지 욕망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사람마다 특히 약한 부분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약한 부분이 문제를 촉발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약점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 보고 경계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성적인 욕망으로 인하여 범죄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여성보다 남성들에게 더 높습니다. 남성은 시각적인 것에 약합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남성들로 하여금 범죄에 빠지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약한 부분에 대해서 늘 경계하면서 대비해야 합니다. 또한 돈에 관한 욕망은 일반적으로 남성보다 여성이 더 강합니다. 여성들은 소유욕이 강합니다. 남들과 비교하여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싶어합니다. 큰 집, 큰 차, 값비싼 보석, 명품을 갖고 싶어하는 욕망이 특별히 더 강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늘 자신의 약점을 놓고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의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경계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명예욕은 대개 남성들에게 더 심합니다. 남자들은 자기 이름을 내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회에 기여하기 위해서 높은 수준의 성취를 이루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권장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 이면의 동기가 자신의 이름을 내고 자기 명예를 높이는 것이라면 조심해야 합니다. 여성들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이것도 역시 그 자체로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때로 그런 욕구는 하나님보다 사람에게 더 마음을 빼앗기게 만든다는 면에서 조심할 일입니다. 제가 대략 남성과 여성의 특징을 따라서 이 세 욕망들을 설명했지만 사실 이런 구분은 모든 사람에게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적인 특징보다 오히려 개인별로 더 차이가 크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자 자신을 돌아보셔야 합니다. 자신의 약점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사단이 그 약점을 파고들어서 넘어뜨리지 못하도록 날마다 경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공간이 유혹받기에 가장 쉬운 장소일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백화점이 가장 유혹받기에 좋은 곳일지 모릅니다. 그 곳이 어떤 곳이든, 여러분을 자주 유혹에 빠트려서 죄짓게 만드는 곳이 있다면 작정하고 출입을 통제해 보십시오. 여러분을 유혹에 빠트리는 시간대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밤늦은 시간에 영화나 비디오를 보는 것이 여러분을 욕망에 빠트리게 한다면 일찍 자는 것으로 삶의 패턴을 바꾸어 보십시오. 유혹을 받는 상황에서 그 유혹을 이겨내려고 하지 말고 유혹받는 상황을 근본적으로 제거하십시오. 왜 이런 문제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문제가 됩니까? 왜 주님께서는 이런 욕망의 문제를 자주 지적하고 계십니까? 그 이유는 이런 탐욕이 하나님의 나라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런 세상적인 욕망을 사모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의 것들을 사모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탐욕을 이겨낼 수 있습니까? 물론 우리는 기본적으로 이런 탐욕과 맞서 싸워야 합니다. 날마다 이런 탐욕을 경계하고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단지 소극적으로 탐욕을 경계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적극적으로 진정으로 가치있는 것을 탐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신령한 것을 탐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늘의 신령한 것을 맛보고 그것을 소망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마지막 날에 영광중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에서 주님과 더불어 살 것을 소망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직도 이 세상의 것을 탐하고 있다면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밭에 있는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팔아서 그 밭을 삽니다. 그 밭에 보화가 담겨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꾼이 값진 진주를 만나면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라도 그 진주를 삽니다. 그 진주가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경험하십시오. 우리 주님과 함께 지내는 그 나라가 얼마나 좋은 것인가를 깊이 경험하십시오.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영적인 가치가 훨씬 더 소중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일시적으로 가치있는 것보다 영원한 가치를 지닌 것이 더욱 소중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 나라를 소망하고 그 나라를 사모하십시오. 그럴 때 이 세상의 욕망을 이기고 영원한 천국의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모두 이 영원한 가치를 더욱 기뻐하고 사모하여 이 세상의 욕망을 이기며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