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안진섭목사 | ||
조회수 | 323 | ||
작성일 | 2007-09-04 00:00:00 |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 |
히브리서 강해 제22강 참된 믿음8: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히브리서 11:21) 제가 고등학교 때 쯤인 것으로 기억됩니다. 하루는 형이 구약성경 창세기를 읽다가 야곱에 대한 부분을 읽으면서 흥분하는 것이었습니다. “야, 진섭아! 야곱은 정말 나쁜 놈이야, 그렇지 않니?” 창세기를 읽으면서 야곱이 나쁜 짓 한 것을 볼 때 마다 흥분하면서 계속 그런 말을 했습니다. 일반적인 시각으로 보면 그 말은 하나도 틀린 데가 없습니다. 야곱은 참 나쁜 사람입니다. 사람이 그렇게 나쁜 짓을 많이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야곱은 어렸을 때 팥죽 한 그릇으로 형의 장자권을 빼앗았습니다. 밖에 나갔다가 돌아온 형이 배가 고프다는데 팥죽 한 그릇 그냥 못 줍니까? 참 나쁜 사람입니다. 그 다음에는 늙어서 눈이 어두운 아버지를 속여서 장자의 축복을 받습니다. 팥죽을 장자권과 바꾼 것은 갑자기 벌어진 사건이지만 아버지를 속인 것은 치밀한 계획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버지를 속이기 위해서 털이 많은 형으로 위장하려고 염소의 가죽을 몸에 붙였습니다. 심지어 에서인지 확신할 수가 없어서 네가 정말 에서냐고 이삭이 물었을 때 야곱은 천연덕스럽게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에서입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라반도 잘못한 것이 많지만 야곱은 자기 재주로 조금씩 외삼촌의 재산을 차지합니다. 결국은 외삼촌의 두 딸들, 두 여종, 그리고 많은 재물을 갖고 외삼촌의 집에서 도망칩니다. 야곱의 인생에는 이와같은 일이 계속 벌어집니다. 야곱은 또한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에서가 자신에게 온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가족과 모든 재산을 두 떼로 나누었습니다. 그 이유는 에서가 한 떼를 치면 다른 떼는 도망가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볼 때마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과연 그 때 야곱은 자기 아내 레아와 라헬 중에 누구를 앞에 있는 무리로 보냈을까, 그게 궁금합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야곱은 아마 레아를 앞세우고 라헬은 뒤에 잘 모셔두었을지도 모릅니다. 혹시 레아는 빼앗기더라도 라헬은 빼앗길 수 없다고 생각할만한 그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처음에 두 떼로 나눌 때는 누구를 앞세웠는지 정확히 나오지 않지만 나중에 에서에게 인사시킬 때는 레아를 앞세우고 라헬을 뒤에 세웁니다. 이런 여러 가지 사건들을 보면 야곱은 정말 나쁜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관점은 무엇입니까? 야곱의 인생을 통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히브리서는 야곱의 인생 중에 그의 마지막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모습으로 그의 믿음을 평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사람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많은 잘못을 저질렀지만 야곱도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변화시켰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완전히 변화된 야곱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야곱은 우리에게 어떤 믿음의 모습을 보여줍니까? 비록 짧은 한 구절의 말씀이지만 이 구절을 묵상하면서 저는 이 구절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1. 믿음으로 야곱은 축복하고... 야곱이 요셉의 아들들에게 축복하는 것 자체가 참 의미가 있습니다. 축복한다는 말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서 축복한다는 말은 본래 구약에서 온 말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축복한다는 말은 크게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축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정확히 말하면 축복한다고 하기 보다는 복을 주신다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둘째로, 사람이 하나님을 축복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송축한다고 번역합니다. 셋째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축복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것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복을 주시기를 기원한다는 뜻입니다. 모든 경우에 복을 주시는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다만 사람이 하나님을 축복할 때는 사람이 하나님께 복을 드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송축하는 것이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축복할 때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복을 내려주시기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그런 배경에서 생각하면 야곱이 지금 요셉의 아들들을 축복한 것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요셉의 두 아들에게 복을 내려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지금 요셉의 두 아들들에게 복을 내려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 야곱의 믿음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야곱의 인생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야곱이 그 동안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야곱은 겸손히 하나님의 복을 구하기보다는 자신의 술수와 능력으로 하나님의 복을 쟁취하는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장자가 되고 싶어서 형의 발꿈치를 붙잡고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이름도 발꿈치를 잡은 자라는 뜻인 야곱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도 형이 배고플 때를 이용하여 형의 장자권을 빼앗았습니다. 급기야는 장자의 축복을 얻기 위해서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가서도 사랑하는 여인을 얻고, 재물을 얻기 위해서 온갖 재주를 다 부립니다. 실제로 그런 술수와 노력을 통해서 상당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야곱은 늘 그런 식으로 살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복을 내려주시기를 겸손히 구하며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힘으로 하나님의 복을 쟁취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 야곱이 이제는 하나님 앞에 조용히 엎드려 하나님의 복을 구합니다. 비록 자신은 하나님의 복을 쟁취하는 인생을 살았지만 자신의 자손들은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복을 누리기를 간절히 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을 쟁취하는 자가 되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복을 쟁취하는 인생이 얼마나 피곤합니까? 겉으로 볼 때, 야곱은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습니다. 어렸을 때 고향을 떠나서 거부가 되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 사이에 네 명의 아내를 얻었고, 많은 자녀를 두었습니다. 많은 돈도 모았습니다. 그만하면 성공적인 인생입니다. 그런데 막상 그의 심령에는 평안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바로 왕 앞에서 고백했던 것처럼 그는 험악한 세월을 살았습니다. 왜 야곱이 그런 인생을 살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 복을 쟁취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복을 차지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항상 원수와 대적이 있게 마련입니다. 야곱은 한때 외삼촌 라반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또한 그의 형 에서에게도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라반과 에서에게 쫓기는 야곱의 모습, 그것은 그의 인생을 잘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의 재주와 능력을 의지하고 사는 삶은 언젠가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만 추구하는 사람은 늘 무엇엔가 쫓길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그 동안 내 힘과 능력으로 축복을 쟁취하면서 살았다면 이제는 겸손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구하는 자가 되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구한다는 것은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이 세상을 바르게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도우셔야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겸손히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삶을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2.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야곱은 인생의 말년에 이집트에 내려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당시 근동지역 전체에 걸쳐 발생했던 기근을 피하여 요셉이 다스리던 이집트에 가서 말년을 보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하게 됩니다. 요셉의 두 아들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입니다. 그 중에서 므낫세가 장남이고 에브라임은 차남입니다. 아버지 요셉은 당연히 므낫세를 야곱의 오른 편에 세우고, 에브라임을 야곱의 왼 편에 세웁니다. 고대 근동에서 오른 편은 축복의 장소였기 때문에 보통 장남을 오른 편에 둡니다. 그런데 그 때 야곱은 손을 엇갈려서 오른 손으로는 차남 에브라임을, 왼손으로는 장남 므낫세를 축복합니다. 요셉은 그 모습이 못마땅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가 눈이 어두워서 잘 못 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요청합니다. “아버지,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아버지의 오른 손을 장남에게 얹고 축복해 주십시오.” 그러나 야곱은 요셉의 요청을 허락하지 않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고 그도 크게 되겠지만 그의 아우가 그 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룰 것이다.” 그렇다면 왜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할 때, 차남에게 더 크게 축복했을까요? 어떤 신학자는 황당한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야곱 자신이 왕년에 아버지를 속였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요셉이 자신을 속일 것 같아서 손을 엇갈려서 축복했다.” 속된 말로 자기가 늘 남을 속여 버릇했기 때문에 자기 아들도 자신을 속일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야곱의 옛날 모습입니다. 야곱은 이제 변화되었습니다. 옛날의 야곱이 아니고 변화된 이스라엘입니다. 그렇다면 왜 야곱은 장남이 아니라 차남에게 축복했습니까? 그 이유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야곱은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따라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통상적으로 장남에게 축복권을 상속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유대인들의 관습을 따르지 않습니다. 아담의 두 아들 중에서 장남인 가인은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에 하나님은 셋이라는 셋째 아들을 통하여 믿음의 대를 이어가십니다. 이삭의 두 아들인 에서와 야곱도 그렇습니다. 동생인 야곱이 결국 믿음의 대를 이어갑니다. 야곱의 열 두 아들 중에서도 장남인 르우벤이 아니라 유다가 대를 이어갑니다. 세상 사람들은 단지 장남이라는 이유로 축복권을 물려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은 다릅니다. 장남이 될 수도 있고 차남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다만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일입니다. 야곱은 그런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서 므낫세가 아닌 에브라임을 더 크게 축복합니다. 야곱의 그런 태도는 자신의 아버지 이삭보다 한 차원 더 높은 믿음을 보여줍니다. 이삭은 자신의 의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야곱을 축복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자신의 의지를 굴복시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자신의 의지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굴복하고, 내 뜻 보다는 그 분의 뜻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야곱이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우는 모습은 바로 그런 믿음을 잘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인생이라고 해서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인생은 마음 먹은대로 된다고 생각하신다면 큰 오산입니다. 혹시 지금까지 그렇게 되었다고 해도 앞으로도 그렇게 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사는 인생은 언젠가 결국은 브레이크가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내 뜻과 고집을 버리고 하나님의 주권에 주목하십시오. 나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3.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할 때 야곱은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 야곱이 지팡이 머리에 의지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야곱은 늘 자신의 힘을 의지해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 야곱이 늙고 힘이 약해져서 이제는 지팡이에 의지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지팡이 하나에 의지하고 서 있는 야곱의 모습은 우리 인생의 연약함과 유한함을 잘 보여줍니다. 야곱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입니까? 아무것도 없이 빈 몸으로 낯선 땅에서 시작하여 나중에는 거부가 된 사람입니다.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날이 밝기까지 씨름한 사람입니다. 지팡이에 의지하고 서 있는 모습은 왠지 야곱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지금 지팡이 하나에 의지하고 서서 하나님께 경배합니다. 그는 일평생 자기 힘으로 세상을 살아보았습니다. 그런데 결론은 자기 힘으로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젊고 혈기 왕성할 때는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늙고 병들어 보니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지팡이에 의지하고 서서 자신의 삶을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힘을 의지하고 살다가 험한 일을 많이 겪었습니다. 가장 사랑하던 아내 라헬의 소생이었던 사랑하던 아들 요셉을 어린 나이에 잃었습니다. 자식을 잃고 얼마나 야곱이 상심하면서 살았겠습니까? 아마 그 마음은 자식을 잃어본 사람만이 알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신에게 하나님은 요셉을 다시 만나는 복을 허락하셨습니다. 야곱이 요셉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천하에 야곱이지만 자기 자식들에게 감쪽같이 속아서 요셉이 죽은 줄만 알았습니다. 그 이후에 요셉을 만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야곱에게 손자들까지 보게 하셨습니다. 자식만 다시 만난 것도 은혜 중에 은혜인데 손자들까지 주신 하나님을 생각할 때 야곱은 감격하여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손자들에게 축복한 후에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서서 하나님께 감사의 경배를 올립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야곱의 모습을 보면 그는 분명히 변화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자신을 의지하고 살았지만 이제 야곱은 더 이상 그런 야곱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사람, 곧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삽니다. 그렇다면 언제 야곱이 이렇게 바뀌었습니까? 야곱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바꾼 사건은 바로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씨름한 것입니다. 거부가 되어 고향 땅으로 돌아오던 야곱은 그의 형 에서가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야곱은 너무 마음이 답답하였습니다. 그의 형 에서가 자신을 죽이려고 오는 것인지 아니면 환영하려고 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가솔들을 다 미리 강을 건너게 하고 혼자 얍복강가에 남았습니다. 그 밤에 야곱은 어떤 사람과 날이 밝기까지 씨름을 합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보낸 천사였습니다. 야곱은 생사를 걸고 싸웁니다. 그 사람이 야곱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에 야곱의 환도뼈를 칩니다. 야곱은 결국 환도뼈가 어긋나서 다리를 절게 됩니다. 많은 분들이 이 사건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도대체 환도뼈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환도뼈라는 뼈는 없습니다. 본래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이 말이 단순히 허벅지 안쪽, 혹은 허벅지 사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개역성경은 환도뼈라고 번역했지만 개역개정판에서는 허벅지 관절이라고 번역했고, 표준새번역은 엉덩이뼈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말을 잘 이해하려면 동일한 단어가 사용된 다른 본문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감을 찾으려고 자기 종을 보낼 때 그 종에게 맹세를 시킵니다. 그런데 그 때 아브라함의 종이 자기 주인의 환도뼈밑에 손을 넣고 맹세합니다. 여러분, 상황을 가만히 상상해 보십시오. 과거 개역성경에서 환도뼈라고 번역된 말은 허벅지 사이 안쪽을 의미합니다. 허벅지 사이에 손을 넣으면 실제로 상대방의 생식기 주변에 손을 넣게 됩니다. 고대 근동에서 맹세할 때 생식기 주변에 손을 대고 맹세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고대 근동사람들이 이해할 때, 생식기는 자손을 생산하는 기관입니다. 그러므로 생식기 주변에 손을 대고 맹세하는 것은 앞으로 태어날 자손들 앞에서 맹세한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다음 세대를 참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대를 이어갈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대를 이을 자손들의 목전에서 맹세한다는 뜻으로 생식기 주변에 손을 대고 맹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천사가 야곱의 환도뼈, 곧 허벅지 관절을 쳤다는 것은 생식기를 쳤다는 의미가 됩니다. 생식기를 공격했다는 것은 적어도 일시적으로라도 이제 더 이상 자손을 낳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이것은 상징적인 의미를 띠는 사건이기 때문에 실제로 영원토록 자녀를 못 낳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실제로 야곱은 그 후에 베냐민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야곱에게 중요한 교훈이 됩니다. 고대인들에게 생식기능을 잃는다는 것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100세에 이삭을 낳은 것을 두고 성경은 거의 죽은 사람이나 방불한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주셨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사실상 이 때 죽은 것입니다. 옛날의 야곱은 이 때 죽었습니다. 그래서 천사가 그 자리에서 야곱의 이름을 바꾸어줍니다. “이제 더 이상 네 이름을 야곱이라고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고 하라.”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직역하면 하나님께서 싸우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 맞추어서 의역을 하면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습니다. 어떻게 이겼습니까? 사실은 하나님의 천사와의 씨름에서 야곱이 졌습니다. 야곱은 천사의 공격으로 생식기능을 상실할 뻔 했습니다. 실제로 그런 기능을 상실한 것은 아닐지라도 그 사건은 야곱을 거의 죽은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야곱은 결국 그 싸움에서 졌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야곱에게는 지는 것이 곧 이기는 것이었습니다. 그 동안 자기 욕심을 따라 살던 야곱, 모든 일을 자기 힘으로 해 보려고 했던 그 야곱, 오로지 성공과 출세만을 위해서 달려왔던 그 야곱은 그 자리에서 지고 말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 때 비로소 야곱이 이스라엘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5)” 내 능력을 의지하던 옛 사람의 습관을 포기하면 비로소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납니다. 내 재주와 능력으로 복을 빼앗으려는 생각을 버리면 비로소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복이 임합니다. 파리 생 쉴피스(Saint-Sulpice) 성당에 가면 둘라크리아가 그린 야곱과 천사라는 벽화가 있습니다. 그 성당에 가서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 그림에 보면 근육질의 남성으로 묘사된 야곱과 날개달린 천사가 손을 붙잡고 씨름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 그림은 두 사람이 씨름하는 전형적인 그림입니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 중반에 유대인 대학살이 일어날 때, 유대인 제이콥 엡슈타인 (Jacob Epstein)이 조각한 “야곱과 천사”라는 석고상도 있습니다. 캘빈 시어벨드는 그 석고상을 보고 그 작품은 서로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천사가 야곱을 포옹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 분의 통찰력이 마음에 깊이 와 닿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옹하고 있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하는 것 같지만 잘 생각해 보면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안고 계십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강조하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주 단순합니다. 내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 힘을 믿고 살지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따라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 고집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을 따라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 생각과 내 고집대로 살려는 옛 사람을 죽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일평생 그런 자신의 옛 자아와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고 고백한 것입니다. 시편 35:27을 보면 주님은 그의 종의 평안함을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NIV 성경은 그의 종의 웰빙(Well Being)을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옛 사람의 모습을 죽이면 마치 인생이 망하는 줄 압니다. 그 때부터 기쁨은 사라지고, 괴로움만 시작되는 줄 압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내 자아를 죽이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그 때부터 참되고 영원한 복을 누립니다. 세상이 주는 웰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웰빙을 경험합니다. 내가 그 분의 종이 되는 순간 내 인생이 고생스러운 것이 아니라 진정한 웰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능력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십시오. 인간의 능력이란 결국 하나님의 손 끝 하나만도 못한 것입니다. 내 힘으로 복을 차지하는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는 자가 되십시오.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복이 진정한 복입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항상 나를 따르는 삶, 바로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 가장 복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을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그를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의지할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더욱 치열하게 이 문제와 싸워야 합니다.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살려는 죄악된 본성과 끊임없이 싸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인생만이 진정으로 영원한 축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 앉아계신 사랑하는 성도들 모두가 자신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세세무궁토록 전능하신 하나님 한 분만 의지하여 살아가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